프리랜서 번역가 분들의 이력서를 둘러보다 보면 와세다대, 북경대, 서울대 등등 과스펙인 분들을 많이 마주하게 된다. 아니 이렇게 과분한 분이 이렇게 누추한 곳에 왜...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사람들과 통번역대학원 석사를 마친 훌륭한 인재들. 하지만 내 경험상 학력과 번역 실력이 일치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드물다. 특히 통번역대학원을 나온 사람들 중에 '오-, 이 사람 이 분야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더 잘하겠지?' 하는 기대를 와장창 깨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화려한 학력과 이력이 이목을 잡아끌기는 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진짜 잘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프리랜서 번역가의 기본적인 소양은 CAT툴을 사용할 수 있는가이다. 지금은 2023년, 원고지에 두꺼운 사전을 두고 펜으로 번역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고 이제 얼마나 기술적으로 번역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시대다. 나는 번역가가 검수를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면 구글 번역기나 chatGPT를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한다(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이지만... 하하). 그런 맥락에서 CAT툴은 내 기준 필수다. 이력이 비슷한 번역가 두 명이 있을 때 한 명만 CAT툴을 사용할 수 있다면 고민 없이 CAT툴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고를 것이다.
어떤 종류의 CAT툴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많은 툴 중에 한 가지만 잘 사용할 수 있다면 다른 툴을 사용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CAT툴의 메커니즘은 비슷하다. TM (Translation Memory), TB (Term Base), QA (Quality Assurance) 체크 기능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가 관건이다. 더 복잡한 기능들이 많지만, 위의 기능들만 대강 사용할 수 있으면 된다. 내가 CAT툴을 작업자의 기본적인 소양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CAT툴이 번역가의 생산성과 퀄리티를 못해도 두 배 정도 올려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CAT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조금 더 설명해 보는 것으로!
그리고 나서 보는 것은 역시 내가 운영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비슷한 분야에 번역 이력이 있는가이다. 보통 문학 번역을 잘하는 사람이 IT 번역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IT 번역을 잘하는 사람이 게임 번역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비슷한 분야의 번역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보통 그 분야의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UI번역을 만연체로 풀어 번역하거나, 경고 팝업 문구를 지나치게 친절한 톤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올라운더처럼 모든 분야의 번역을 찰떡같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7년 일하는 동안 아직 만나본 적은 없다. (혹시 계시다면 연락처 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업자가 나와 어떤 식으로 소통하는 지를 본다. 이건 이력서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아니고, 번역 테스트 페이퍼를 보내면서, 문자, 전화, 메일 등을 주고받으면서 확인할 수 있다. 보통 번역가가 고용인으로부터 일감을 받아서 번역만 잘해서 보내면 장땡이라고 생각하지만, PM과 LL이 직접 번역가와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 일이 자잘하게 많다. HO (Handoff) 패키지(번역에 필요한 소스 파일, CAT툴로 프렙 된 파일, 용어집, 지침 등)를 주고받고 번역가 쪽에서 문의 사항을 전달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LL 쪽에서 번역이 잘못된 부분을 확인해서 번역가 쪽으로 피드백을 보내주기도 한다. 그리고 작업이 완료되고 나면 PM과는 작업비 지급 문제로 이후에 추가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한다.
조금 더 풀어서 얘기하자면 비즈니스 매너를 잘 지켜서 친절하게 의사소통 할 수 있는지를 본다는 의미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프리랜서 판에 매너 없는 사람들이 많다. 뜨내기처럼 이 업계를 찍먹하고 넘어가는 사람들도 무수하다. 아무래도 정규직이 아니다 보니 여기저기 프로젝트에서 분탕 쳐도 번역만 잘해주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거른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이든 나중이든 꼭 의사소통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참고로, 꽤 많은 번역회사는 인력풀을 데이터베이스로 관리하는데 이 데이터베이스에 이런 내용(비매너)도 같이 기재가 된다. 그러니 가급적 상호 간 좋은 태도를 유지하는 게 좋다.
만약 매너도 좋고 내가 원하는 분야에 번역 이력도 있는데 CAT툴만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PM이나 LL선에서 CAT툴을 교육해서 온보딩시키기도 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작업자가 CAT툴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안타깝지만 온보딩을 포기한다. 내가 일했던 회사는 작업자가 무조건 CAT툴을 사용할 줄 알아야 했기에 그랬지만, 그렇지 않은 회사들도 많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번역가로 커리어를 쌓고 싶다면 CAT툴은 무조건 사용해 보기를 추천한다. 제일 많이 사용하는 툴은 아마도 RWS사의 Trados 일 것이고 그 외 Phrase (구 Memsource), MemoQ, Smartcat, Translation Workspace 등등 수많은 유료 프로그램들이 있고, OmegaT와 같이 아주 기본적인 기능만 가진 무료툴도 있다. 번역 업체마다 사용하는 툴이 다르지만 보통 Xliff (XML Localization Interchange File Format) 확장자의 파일을 업로드해서 번역을 진행할 수 있는 툴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문제없다.
결론을 내자면 7년 차 로컬 PM이 보기에 잘하는 번역가는 퀄리티는 당연히 기본적으로 좋아야 하고, 운영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비슷한 분야의 이력이 있고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다. CAT툴까지 잘 다룰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배울 자세가 되어있다면 충분하다. 이제 막 업계에 들어와 프리랜스로 번역일을 시작했다면 PM들과 좋은 관계를 쌓는 것을 추천한다. 어쨌든 그들이 여러분을 찾아주는 사람이기에...
여담이지만, 프리랜서 번역가를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PM들도 많다. 감히 조언하건대, 프리랜서 번역가 여러분도 이런 PM들과 업체를 거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