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의 관계를 온전히 구축하고 싶어요
작년 어학연수지였어요. 남녀로 나눠 토론하는 수업이 있었어요. 서로 다른 그룹 간의 언성이 높아져 당시 옆에 있던 친구에게 속삭였습니다. “박스 밖으로 나가자. 여자가 아닌 너의 정체성이 뭐야?” 그 친구는 모델이라는 자기 직업을 가져와 논쟁을 마쳤어요. 평소에도 일에 자부심이 있는 친구였죠. 누군가의 선명한 확신을 보는 일은 흐뭇하더라고요. 그때까지는 저도 비슷했어요. 제 안에서는 제가 살면서 일로 행복해졌다는 자부심이 있었거든요. 요가 일도, 캠핑장과 펜션 일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유니크한 행동들을 많이 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웃을 때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3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귀촌 3년 차가 찾아왔습니다. 감정이 밑바닥을 완전히 치더니 요즘은 투명해진 상태예요.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다 보면 이 사람의 정체성 비중이 어디에 많이 놓여있는지가 느껴져요. 저는 동성을 만날 기회가 많다 보니 아무래도 더 극명하게 둘로 나뉘는 걸 보게 돼요. 그 둘은 일과 사랑입니다. 어릴 때 좋아했던 <이매진>이라는 순정만화가 있는데요. 그 만화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남자들은 ‘싸우는 나’라는 정체성을 좋아하지. 그 얼마나 알량한 자기 확인이람? 나는 내가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으면 날아가 버릴 거야.” 이상하게 이 대사를 좋아했습니다. ‘사랑받는 나’라는 정체성이 ‘싸우는 나’에 비해 알량하지 않은지에 대한 의견과는 별개로, 저 자신이 바로 알량하지 않은 자기 확인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일에서 오는 성취도 때때로 흐려지는 데다 사랑에 대한 감각도 사뭇 증발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스럽지 않습니다. 증명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처럼 숨을 고르며 질문하고 있어요. ‘일과 사랑이 아닌 나는,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하고요.
우리가 흔히 붙잡는 정체성의 두 축—일과 사랑—은 대부분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들이에요.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고 앞으로도 단계마다 새로운 의미를 고민하게 되겠죠. 그런데 저는 우리가 자신을 규정한다고 믿는 요소들 외에도 저와의 관계를 온전히 구축하고 싶어요. 그래서 외부의 역할을 벗겨낸 뒤에도 남아 있는 ‘나의 알맹이’는 무엇인지를 들여다봅니다. 저는 그 대답을 아주 작은 감각들에서 찾고 있어요. 설명하기엔 사소하지만 반복되는 구체적인 감각들이요. 무엇을 오래 바라보는지, 어떤 장면에서 괜히 마음이 차오르는지, 나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인지. 그런 감각들은 비교하거나 자랑할 수는 없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확신을 줘요. 현재의 저는 자연과 사람 속에서 이를 발견해요. 바람이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들 때가 좋고, 무사히 해가 넘어갈 때 내 안에 느껴지는 구태의연한 기쁨이 좋고, 하지 않고 넘어가도 되는 ‘잘 먹었습니다’라는 상투적인 인사가 좋아요. 좋은 자기 확인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리듬. 외부가 잠시 사라져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중심. 신기하게도 제 안을 붙잡기 시작하자 다시 세상이 손짓하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언제 날아가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