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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일 작가 Jan 30. 2024

이퀄리브리엄, 공개처형과 조작된 감정

묻지마 살인의 시대



“타탕! 타탕! 타탕!”


  세 번의 총성이 울렸다. 발사된 총탄은 총 아홉 발. ‘목표물’이 매달린 말뚝 5미터 앞에 군인 세 명이 차렷 자세로 섰다. 그리고 “쏴!” 사격 신호와 함께 동시에 목표물의 무릎과 가슴,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때 나는 겨우 일곱 살, 소학교 1학년이었다. 광대가 춤추는 구경꺼리를 관람하듯 수백 명이 모인 현장에서 우리는 키 작고 어리다는 이유로 목표물의 맨 앞에 서서 ‘직관’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관람’에 동원된 행사였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앞자리에서 관람한 ‘공개처형’ 장면이었다. 공개처형은 죄수의 죄명을 소상하게 읊어대는 순서와 함께 당과 수령의 교시를 하달하는 연설로 시작됐다. 죄명은 수령님 교시가 적힌 비석에 박혀있는 김일성 초상화를 훼손했다는 이유다. 정확히는 초상화 테두리에 장식된 구리로 만든 월계수 장식을 뜯어서 팔아먹은 죄였다. 그리고 행해진 처형과 시체정리까지 불과 1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군인들은 곧바로 준비해둔 가마니로 시체를 둘둘 말아 트럭에 싣고 떠났다. 현장에 그대로 박혀있는 말뚝에는 피가 튀겨있었고 바닥의 흙은 어느새 흥건한 피로 젖어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말뚝 가까이로 우르르 몰려가 핏자국을 보며 구시렁구시렁 거리며 혀끝을 찼다. 그리고는 이내 별일 없었다는 듯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각자 집으로 향했다. 나도 10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책가방과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급하게 밥을 삼킨 후 창문에 매달려 그 곳을 다시 내다보았다. 말뚝이 박힌 장소는 우리 집 창문에서도 멀리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그날 나는 아무 감정도 동요도 없었다. 단지 기억뿐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공개처형 장면이다. 3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생생하게 잊히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끔찍한 장면이다. 백번이고 죽어 마땅한 죄수라 할지언정 말뚝에 매단 채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개처형을 하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서운 인민재판이었다. 마치 중세시대 마녀를 화형시키거나 단두대에 세워 공개처형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런 어릴 적 경험이 트라우마(trauma)가 돼서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그 자체로 이미 잠재되어 있는 트라우마라 하겠다. 북에서 온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한 번씩은 공개처형을 목격했다. 공개처형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동원되는 것은 물론 다들 그 날짜 그 장소에 구경까지 가려고 했으니.


  북한은 형법에 사형제도를 두고 있으며 수시로 공개처형을 집행하고 있다. 북한의 공개처형은 인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마키아벨리식의 공포정치이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가장 효과적인 통치방식을 ‘공포에 기초한 지배’라고 설명했다. 인민들을 쉽게 지배하는 데에는 공포가 최고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공포정치를 매우 유용하게 통치론에 적용시켰다. 공개처형은 이런 공포정치의 대표적인 장면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감정을 억제하도록, 더 나아가 감정이 무뎌지도록 세뇌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공개처형을 보고도 무감각했던 이유는 이런 조작된 감정 때문이었다.


  빈번한 폭력은 우리안의 방어기제를 작동시켜 폭력에 대한 감정을 무감각한 상태로, 억제된 상태로 적응시킨다. 받아들일 수 없는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감정(욕망)을 조절하거나 왜곡하여 마음의 평정을 찾는 심리적 기제인 것이다. 이런 방어기제를 효과적으로 조정하고 명분을 주는 사회적 기제는 바로 ‘교육’이다. 교육을 부정적 의미에서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세뇌’이다. 공개처형을 관람시키는 북한의 행태가 바로 부정적 의미에서의 교육, 즉 ‘세뇌교육’이다. 공개처형 장면을 직관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와서 밥 먹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죽어도 싸다”는 명분을 국가가 심어준다. 그리고 거기에 그 어떤 감정도 동요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교육에 익숙해진 전형적인 세뇌당한 아이였다. 어디 나뿐인가. 북한사회 전체가 그렇다. 북한은 조작된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2003년에 개봉한 영화 <이퀄리브리엄>이 있다. 3차 대전 이후의 미래 세계 ‘리브리아’를 배경으로 ‘감정을 느끼는 자’들을 박멸하는 것이 이 세계의 법과 의무다. 무장한 군인들이 사방에서 감시한다. 리브리아에서는 누구든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랑, 증오, 분노 등의 감정을 억제하는 약물 ‘프로지움’을 주기적으로 투약해야 한다.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 즉 감정이 억제된 상태, 감정의 기복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이 평정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공개처형을 보고도 감정의 기복 없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북한 인민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북한사회는 아이가 태어나서 걸음마를 뗄 때부터 세뇌교육을 시킨다. 마치 리브리아의 프로지움 약물처럼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북한사회가 ‘리브리아’처럼 감정이 완전히 억제된 사회라는 말은 아니다.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도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익숙해져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다만 ‘묻지마 살인’의 시대가 우리의 일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폭력에 감정이입을 해서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은, 폭력에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묻지마 폭력과 살인이 빈번하게 발생해도 거기에 무감각해지고, 사회적 참사가 발생해도 책임도 대책도 마련되지 않는다면 자발적 ‘이퀄리브리엄’ 상태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퀄리브리엄 상태를 경계해야 한다.


  요즘 세계는 점점 사형제를 폐지하는 추세다. 특히 사형제도 폐지여부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1997년 12월 30일 마지막 사형을 집행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2007년부터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하지만 법률상 사형제도는 여전히 존재하며 지금까지도 ‘사형선고’판결이 나오고 있다. 무기징역 등으로 감형된 19명을 빼면 현재 남아 있는 사형 확정자는 모두 59명이다. 최근 들어 ‘묻지마 살인’, ‘연쇄 성폭행’, ‘연쇄 살인’ 등 흉악범죄가 빈번히 발생하자 사형집행에 대한 찬성 여론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동안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에 대한 사형집행이 없어 무기징역으로 복역하다 가석방이 되거나, 장기복역 후 형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는 연쇄 살인범이 생기면서 우려가 커진 탓이다. 논란이 일자 법무부는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형을 신설했고 지난 달 30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즉 기존의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를 가석방이 허용되는 무기형과 가석방이 허용되지 않는 무기형으로 구분한 것이다. 잇단 흉악범들의 출소로 논란이 일자 흉악범을 절대적 종신형으로 사회에서 영구 격리한다는 조치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대법원은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은 사형제도 폐지를 전제로 논해야 한다며 위헌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시민사회도 인권을 이유로 찬반이 팽팽하다. 하지만 살인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대중 여론은 사형제 찬성 쪽으로 기울어지기 일쑤다. 주요 선진국들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이유는 범죄자의 생명권 측면에서다. 아무리 흉악범죄자라고 해도 우리에게 타인의 생명을 뺏을 권리는 없다는 주장이다.


  사형제도는 법적 절차에 따라 사람의 생명을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공개처형이다. 다만 대중들 앞이 아닌 비공개 장소인 사형장에서 처형할 뿐이다. 강력범죄자들의 재범률이 낮아지지 않는 것도 사형제 부활을 찬성하게 하는 주요 요인이다.


  요즘은 그야말로 ‘묻지마 살인’의 시대다. 아무 원한도 연고도 없는 사람이 범죄자들의 심심풀이로, 감정조절이 안 되는 질병에 의한 폭력으로 희생당하고 있다. 호신용 장비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더 나아가 총기소지를 합법화 하자는 주장까지 연결된다. 그동안 치안이 가장 좋은 나라 중 한 곳으로 평가받았던 한국이 이제는 ‘묻지마’ 폭력과 살인으로 ‘안전’이 주요 쟁점이 되었다. 폭력이 일상에 빈번하면 사회는 불안해진다. 그리고 동시에 감정은 폭력에 비례하게 반응하여 무감각해진다. 개인의 감정이 무뎌져가기를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국가의 폭력이지 않을까.


(이 글은 계간지 <인본세상> 2023 가을호와 계간지 <통일코리아>에도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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