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식 필름 카메라에 얽힌 부끄러운 사연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우리 집 장롱에는 가죽커버에 담긴 카메라가 한 대 있었다. 그 귀한 카메라가 밝은 빛을 볼 수 있던 때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아니면 시상식이나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 뿐이었다.
평소 그 카메라에 눈독을 들이며 호시탐탐 사용할 날을 기다리던 나는 어느 해 소풍 가는 날 그 카메라를 들고 가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나의 주장은 일언지하에 묵살되고 말았다. “형이나 누나들도 소풍 갈 때는 카메라를 갖고 가지 않았는데 막내인 네가 무슨 카메라냐”는 것이었다. 나의 선언은 그야말로 선언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집에 아무도 없는 날 몰래 안방으로 침투해서 장롱 안 깊숙이 보관되어 있는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꺼내서 뚜껑을 열어보고 필름을 넣는 방법과 빼는 방법, 조리개 같은 것을 혼자 연구하고는 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던 때라 카메라에 대한 상세한 작동방법을 숙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놀랍게도 우리 가족 아무도 그 카메라를 어떻게 다루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봐도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와 카메라의 밀회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 집에는 명자라는 누나가 같이 살고 있었다. 명자 누나는 우리 가족과 친인척 관계는 아니었고 우리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 살림을 같이하고 일정액의 보수를 받는 그런 관계였다. 그러니까 명자누나의 직업은 '가정부'였고 당시에는 이런 누나들을 속된 말로 ‘식모’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명자 누나의 나이는 나보다 예닐곱 살은 위였을 것이다. 명자 누나 역시 고등학교에 다닐 정도의 나이였는데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학교를 가지 못하고 남의 집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 생각하자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꽃다운 나이에 배움의 길을 가지 못하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으니 본인인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랴.
그럼에도 철없던 나는 객지생활 하고 있는 명자누나를 곯려주기 일쑤였다. 도시에서 태어나지 않아 순박하고 소심한 명자누나는 한창 여드름이 나고 심술투성이인 사춘기 소년에게는 놀려먹기 좋은 먹잇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명자누나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곯려 주고는 했고 나 때문에 명자누나가 우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명자 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랑감은 한 동네에 살던 기술자였는데 우리 집에 수리를 하러 들렀다가 명자 누나가 눈에 들어왔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만나다가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는 명자 누나의 결혼을 내 자식 챙기듯이 알뜰살뜰 준비하셨고 드디어 결혼식 날이 다가오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식에 준비되지 않은 사항이 하나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대책마련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결혼식 사진을 찍을 사진기사는 섭외가 되어 신랑신부 사진과 가족친지 사진 등은 해결이 되었는데 결혼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양한 모습을 담을 카메라맨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혼식 사진 내가 찍을게.”
나는 그동안 명자 누나에 대한 악행을 조금이라도 감출 요량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일면으로는 그동안 빈 카메라로 연구에 연구만 거듭해왔던 소중한 카메라를 합법적으로(?) 마음대로 다루어 볼 수 있다는 생각도 한몫했으리라.
“네가 정말 결혼식 사진을 찍을 수 있어?”
가족들은 나의 발언에 반신반의했고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동안 카메라를 꺼내서 계속 연습해 왔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어.”
“그래 그럼 한번 잘 찍어봐라.”
나는 어머니에게 돈을 받아 36장짜리 코닥 필름을 구입했다. 당시 카메라 필름은 24장짜리와 36장짜리로 나뉘는데 큰일이 있어야 36장짜리를 구입했고 웬만하면 24장짜리 필름으로 만족하던 때였다. 당시에는 사진 촬영을 하면 따로 인화를 해야 사진을 볼 수 있었으니 36장 필름 촬영에 다소 큰 사이즈로 인화를 하게 되면 결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할 수 있었다.
명자 누나 결혼식을 카메라 필름 36장에 모두 담으려면 어떻게 찍어야 좋을까? 하객을 맞이하는 양가 부모의 흐뭇한 모습, 당당한 신랑 입장, 결혼식의 주인공 신부 명자 누나의 입장, 주례아저씨의 근엄한 모습, 신랑 신부 행진, 가족사진, 친구 사진 그리고 폐백사진까지 담아야겠지...
나는 시간안배를 골똘히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멋진 결혼식 장면을 상상했다.
드디어 결혼식 날 나는 단 한 벌뿐인 베이지 색 콤비 상의 재킷에 아끼던 청바지를 차려입고 당당하게 카메라를 맨 채로 결혼식에 당도했다. 그리고 어디에서 본 적이 있는지 결혼식장을 횡으로 종으로 누비며 이런 저런 자세를 취해가며 멋진 장면들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이 모두 끝나고 맛있는 음식으로 피로연을 즐긴 다음 나는 가족들의 격려를 한 몸에 받았다.
“너는 언제 그렇게 카메라를 배워서 사진을 잘 찍니?”
“이 정도야 보통이지 뭐 하하.”
나는 열심히 찍은 필름을 동네 현상소에 맡기고는 인화가 될 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명자 누나의 결혼식 사진을 찾으러 가는 날. 나는 어머니한테 인화비를 받아 유쾌하게 현상소를 찾아갔다.
“아저씨 사진 받으러 왔어요.”
“아 학생. 안 그래도 내가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전화번호가 안 적혀 있어서 못했어.”
“네? 무슨 일로요?”
“사진이 한 장도 안 찍혔어.”
“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36번이 찍힌 걸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요?”
“학생. 필름이 감기지 않아도 넘버링은 돌아가요. 필름을 처음 감을 때 필름 끝부분이 카메라에 물리지가 않아서 계속 헛바퀴만 돌아간 거야.”
“...”
“그래도 그 필름은 아직 새 거니까 다시 사용할 수 있어요.”
“...”
나는 할 말을 잊고 그 자리에 잠시 서있었다.
며칠 후 학교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어머니께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명자누나가 너한테 전화했더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명자 누나의 전화를 몇 번인가 피하다가 결국 마지못해 수화기를 들고야 말았다.
“결혼식 사진 아직도 안 나왔니?”
명자 누나의 목소리였다.
“결혼식 사진 한 장도 안 나왔어.”
“아직 사진을 안 뽑았니? 내가 인화비 줄게 사진 좀 뽑아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사진이 한 장도 안 찍혔어.”
“...”
실망한 명자 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생에 단 한번 그것도 일생에 가장 아름다운 날인 신부의 결혼식 사진이 한 장도 없다니. 물론 전문기사가 촬영한 큰 사진들은 있었지만 그런 사진들은 기록이 중심이 되는 사진이고 자연스럽고 재치가 넘치는 스냅사진들은 단 한 장도 건지지 못했으니 실망감은 대단했으리라.
나는 오랜 시간 그 사건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나의 자녀들이 결혼식을 준비한다니까 오래전 그 사건이 생각이 났다.
그렇게 큰 실수를 하고서도 나는 명자 누나에게 단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표현이 서툰 사춘기 소년이라고 치더라도 그것은 중대한 실수요 비난받아 마땅한 사건이었다.
이제는 소식이 끊겼지만 명자 누나도 이제는 귀밑머리가 제법 허옇게 변해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 그 일이 떠오르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명자 누나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