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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와 함께라면 Aug 20. 2023

가장 뜨거웠던 등반길, 갈증의 끝에서 만난 물회 한그릇

내 인생 가장 뜨거웠던 날, '인생 물회'의 추억

2023년 8월 5일 이곳 가평의 날씨는 최고 38도에 육박했다. 반년 여를 쉬다 새로 시작한 펜션에서 잠시 야외작업을 하다 보면 땀이 흘러 상하의가 흥건해 지고는 했다. 올여름은 유난히도 더운 것 같다. 잠시 갈증을 느껴 차가운 정수기 물을 따르다 보니 불과 몇 년 전 뜨거웠던 날의 기억이 새로워졌다.


지금은 공기 좋고 한적한 가평에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인수봉과 선인봉을 비롯하여 전국의 암장을 누비며 열정적으로 암벽을 타던 클라이머였다. 그중 서울 북한산에 위치한 인수봉은 내가 가장 사랑하던 암벽이었다. 인수봉에는 모두 89개의 암벽코스가 있으며 나는 그중 잘 등반하지 않는 코스를 빼면 거의 대부분의 암벽코스를 섭렵했다.


인수봉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한 바윗길은 동양길이다. 동양길은 내가 본격적으로 등반을 시작한 이후 인수봉에서 가장 먼저 선등을 섰던 코스이기도 했고 초보시절 등반 중 날이 저물고 자일이 빠지지 않아 오도 가도 못하며 애를 태우다가 간신히 달빛을 받으며 하강했던 추억의 코스이기도 하다.


만만치 않은 크랙을 가르고 처음 3 피치만 지나면  하늘로 치솟듯 장쾌한 바윗길이 펼쳐지는 하늘길도 내가 사랑했던 코스였다. 안전장치를 걸기도 애매한 첫 피치에서 추락을 하면 그대로 발목을 다치는 코스이기에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힘으로 크랙을 뜯으며 등반하는 재미가 있는 길이었다.


검악 A길은 독특한 사연을 갖고 있는 암벽 코스다. 1968년 여름. 숙명여대 4학년 백명순은 김정명과 만났고 암벽등반을 하는 유서 깊은 산악회인 검악산악회에 입회했다. 그러나 백명순은 안타깝게도 백운대 바윗길에서 추락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백명순은 인수봉 남서면에 위치한 열십자로 그어진 크랙을 가리키며 "저기에 바윗길을 내면 어떨까"라고 버릇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검악산악회는 백명순을 추억하며 1년여에 걸쳐 바윗길을 개척했고 검악길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백명순을 사랑했던 김정명은 그녀를 못 잊어서였을까? 그는 산과 바위를 떠났고 결국 한국마저 떠났다고 한다.  


인수봉을 이야기하자면 인수봉을 찾는 클라이머들이 가장 선호하는 바윗길 중 하나인 의대길을 빼놓을 수 없다. 초보 선등자 시절 숱한 등반으로 마치 기름항아리처럼 매끄러운 2 피치에서 두 번 세 번을 추락하며 올랐던 바윗길이기도 하다. 지방의 난다 긴다 하는 클라이머들이 불과 10A 등급의 바윗길에서 연방 추락하며 "서울사람들 정말 깍쟁이"라며 한탄을 하는 까다로운 바윗길이다. 인수봉을 웬만큼 등반한 클라이머라면 그 어려운 의대도 여러 번 졸업을 하게 된다. 인수봉 의대길은 정말로 1971년 여름 서울의대 산악부원들이 개척한 길이다.


암벽등반 초보시절을 지나 자연스레 선등을 서게 되었을 때 대원들을 이끌고 등반을 시작하노라면 바람만 세게 불어도 긴장을 하고는 했다. 그날 대원 모두가 사고 없이 안전하게 등반을 하고 또 안전하게 하강을 완료하기까지 무거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등반을 할 때에도 나는 배낭에 얼린 물 1리터만 넣고 조금씩 입술을 축이며 짧게는 서 너 시간 길게는 5~6시간에 이르는 등반을 완료했다. 한 피치를 마칠 때마다 목을 축이며 가다 보면 하강포인트에 이르기 훨씬 전에 물은 떨어지고 갈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갈증을 참으며 하산 후 북한산 초입에 위치한 단골 통나무 식당에 가서 얼린 맥주잔에 이가 시릴 정도로 차디 찬 맥주를 따서 연거푸 세잔을 마실 생각을 하며 입에 침이 고이게끔 했다.   


하강을 완료하고 단골식당으로 향하는 하산시간 약 1시간 동안에도 나는 갈증을 나름 즐기며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생각에 벌써부터 행복해지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큰 욕심 없이 단순했으며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등반을 계속하던 2018년 7월 22일이었다.


매년 여름이면 산악회 회원들과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도 테스트해 볼 겸 설레는 원정등반을 떠나게 되고 원정등반의 목적지는 대부분 설악산이 되기 일쑤였다. 전날 설악산 장군봉 10월 1일생을 등반하며 발바닥이 데일 정도의 폭염에 놀란 우리는 저녁회의를 하며 나름 묘수를 찾아냈다.


"설악산 원정까지 와서 무더위 때문에 등반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뜨거운 날씨에 등반을 하자면 자칫 탈수라던지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으니 날씨가 더워지는 낮시간을 피해서 새벽부터 등반을 시작해서 낮시간이 되기 전에 등반을 끝내자."라는 것이었다.


나름 등반의 잔뼈가 굵은 5.11급 클라이머들이 새벽 5시부터 등반하여 모두 12 피치를 5시간 만에 완주하자는 계획이었으니 그렇게 무리한 시도는 아니었다. 의기가 투합하여 추려진 네 명의 클라이머들은 얼음물을 각자 2리터씩 챙기고 새벽 4시에 산장을 출발하기로 했다.


산장을 출발하여 삼형제봉 적벽을 올라설 때까지만 해도 이 계획은 맞아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8시경부터 강하게 쏟아지는 햇볕과 고온으로 지치면서 등반은 지연되고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빠르게 지쳐가기 시작했다.


설악산 삼형제봉 코스는 워낙에 긴 바윗길이므로 중간에 탈출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그러나 이미 탈수가 시작된 상황에서도 네 명의 독한 클라이머들은 그 누구도 탈출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발바닥이 데일 것 같이 뜨거운 암벽길을 한 피치 한 피치씩 오르며 결국 등반을 시작한 지 9시간이나 흐른 오후 2시경에야 등반을 마칠 수 있었다. 네 명의 물통은 이미 다 비워졌고 배낭에서는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었다. 네 명의 독한 클라이머들은 갈증을 참고 또 참으며 간신히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삼형제길을 완료하고 하강을 하면 비선대 계곡보다는 금강굴이 가깝다. 우리는 금강굴에 가면 반드시 스님이 떠다 놓은 시원한 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금강굴 철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그러나 그날따라 우리에게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땀을 심하게 흘리고 이미 그 땀이 말라붙어 허옇게 소금이 버석버석한 얼굴들을 보고 스님은 말했다.


"어쩌죠? 오늘 방문하신 손님들이 식수를 다 마셔버렸는데요. 날이 워낙에 더웠어야 말이죠."


스님은 주전자에 조금 남은 물을 끓여 뜨거운 차를 한잔 내놓았고 우리는 그 한잔을 한 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이제 남은 방법,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은 비선대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밖에 없었다. 금강굴에서 계곡까지는 최소한 30~40분 이상은 급경사길을 걸어내려가야 한다. 우리는 뒤늦게 등반장비를 정리하고 각자 자신의 장비를 챙겼다.


그런데 배낭을 메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야 말았다. 이 같은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의학적인 원인은 모르지만 아마도 탈수현상이 빚어낸 결과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설마 이대로 영원히 귀가 먹는 일은 없겠지" 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그렇게 귀가 멍한 상태로 하산을 시작했고 이윽고 계곡에 다다르게 되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계곡으로 뛰어들었고 그 물을 벌컥벌컥 들여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소 차디찬 비선대 계곡물도 생각처럼 시원하지는 않았다. 워낙 무더운 날씨에 계곡물도 미지근하게 데워진 탓일 것이다. 그렇게 갈증을 달래고 보니 이번에는 허기가 확 몰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침도 먹지 않았고 비상식량으로 준비한 빵이나 과자 부스러기 정도만 먹으며 고강도의 암벽등반을 하며 오후 3시까지 버텼던 것이다.


우리는 급하게 차를 몰고 속초로 향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에 우리는 늦은 점심식사 혹은 이른 저녁식사로 무엇을 먹을 것인지 이야기했다.


네 명의 클라이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물회를 떠올렸다. 그리고 가장 최근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청*수 물횟집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가 얼음물을 벌컥벌컥 연신 들이켜고는 시계를 보니 오후 5시였다. 장장 12시간이나  폭염과 대결한 정말 뜨거운 하루였던 것이다.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물회가 등장했고 우리는 그 찬란한 물회의 자태를 바라보며 흡입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1~2분 안에 물회 한 그릇을 싹싹 비운 것 같다. 그 맛이란 이 세상의 이 아니었다. 산과 바위와, 바다와 인간과, 여름과 추억과, 희망과 기쁨이 교차하는 화려하고 강렬한 맛이었다. 아니 그것은 맛이라기보다는 삶의 전율이자 아직 우리는 살아있으며 강하다는 자의식의 발현이자 기쁨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한 그릇의 물회를 거침없이 들이키고 한숨을 돌렸을 때 그제야 막혀있던 귀가 뚫리며 세상의 온갖 소음들이 내 귀로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날의 물회 한 그릇. 지금도 뜨거운  여름날에는 이따금씩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그때 그 순간 그  놀라웠던 맛이 다시금 생각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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