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모나카에 얽힌 추억
서울에 일이 있어 운전을 하고 가는 길에 우연히 장충동을 지나가게 되었다. 몇 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여러 가지 상념이 지나갔다. 장충동은 내게 여러 가지 추억이 있는 곳이다. 직관한 적은 없었지만 어린 시절 우리들의 우상이었던 레슬링 박치기왕 김일 선수가 경기를 펼치던 곳이 바로 장충동을 상징하는 장충체육관이었으며 그가 TV에 등장하는 날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김일 선수를 응원했다. 경기 초반 그는 주로 반칙을 사용하는 외국 선수들에게 번번이 당하고야 만다. 외국 선수들은 심판의 눈을 속여가며 흉기를 팬츠에 숨겨놓고 사용하는 등 잘도 반칙을 했다. 인내가 극에 달한 김일 선수가 이윽고 박치기 한방을 시전 하게 되면 상대 선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가떨어지고 김일 선수는 통쾌한 승리를 거두고는 했다. 물론 그 레슬링 경기가 사전에 잘 짜인 극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내가 어릴 적에는 장충체육관에서 아이스쇼를 자주 했다. 거의 연례행사처럼 열리는 대표적인 공연이 볼쇼이아이스쇼였다. 은반 위를 날렵하게 스케이팅하며 묘기를 펼치는 스케이터들의 환상적인 모습이 연출되면 홀린 듯이 박수를 쳤던 곳이 바로 장충체육관이었다. 그 넓은 체육관 바닥에 어떻게 얼음을 얼려 스케이트장을 만드는지 무척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김연아와 같은 걸출한 피겨스타가 없을 때였다 간혹 외국 공연단의 일원으로 한국 출연자라도 보이게 되면 더욱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고는 했다.
장충동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헤드헌터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회사가 있는 곳이기도 했고 출판사를 경영할 때 알게 된 작가를 만나러 다자인하우스를 방문하여 사옥 구경을 하고 일행들이 모두 장충동 족발집으로 자리를 옮겨 즐겁게 회식을 했던 기억도 새롭다.
잡지일을 할 때는 장충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산악인 엄홍길 씨를 만나 인터뷰한 적도 있다. 두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역시 눈에서 내뿜는 안광이, 기가 대단히 강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장충동에서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동국대학교가 나오고 그 고개를 넘어서면 중구 필동이 되는데 그곳에는 신입사원 때 자취를 하던 하숙집이 있었다. 그 하숙집에는 절친한 형이 먼저 하숙을 하고 있었고 뒤이어 내가 그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입사동기까지 불러 젊은 청춘들이 세상과 꿈을 이야기하던 정겨운 공간이었다. 신문사에, 무역회사에 증권사에 다니던 그때 그 총각들은 이제 벌써 초로의 신사들이 되어 있겠지...
그런데 장충동에서 정작 나의 가장 큰 추억을 불러일으킨 것은 제과점 태극당이었고 그 태극당의 과자 중 하나인 모나카였다. 태극당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점이고 그 시절에도 단팥 모나카와 모나카 안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아이스크림 모나카도 팔고 있었다.
구운 찹쌀 반죽에 팥소를 넣은 모나카는 '음력 보름밤의 달'을 뜻하는 일본어 ‘모나카노츠키[最中の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겉은 찹쌀반죽으로 얇게 구워서 바삭하고 안에는 달고 맛있는 팥이 가득 들어있어 요즘말로 치면 겉바속촉의 원조격이라고도 부를 만하다. 우리말로는 ‘팥소 과자’로 부르는 것이 맞다고 하는데 '오뎅'을 '어묵'보다는 '오뎅'이라 부르고 '자장면'을 된소리가 나는 '짜장면'으로 불러야 제 맛이 살듯이 역시 모나카는 모나카로 불러야 제 맛이 난다.
그런데 왜 갑자기 태극당의 모나카가 오래된 기억에서 자동으로 추출되었을까? 시간은 자그마치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태어나서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그곳에서 자라났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셋방살이를 하였는데 1학년 때쯤 부모님은 경사가 아주 심해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언덕바지 한옥집을 내 집으로 마련하여 우리 가족은 기대를 가득 안고 즐겁게 이사를 하였다. 이사를 가느라 흩어진 신발들을 챙겨 들고 새집으로 걸어가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아버지가 퇴근하실 시간에 맞춰서 어머니는 정성껏 저녁식사를 준비하셨다. 작은 소반에 차려진 아버지의 식단은, 메뉴는 자주 바뀌었지만 구성은 거의 동일했다. 밥은 우선 쌀밥이었다. 그 쌀밥은 가족을 위해 하루종일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가장에게 드리는 숭고한 헌사였다. 보리밥이 한 톨도 섞이지 않아 하얀 쌀밥이 공기에 소복하게 담기면 그 옆에는 으레 찌개 뚝배기가 올라왔다. 아마 여러 가지 종류의 찌개를 드셨겠지만 내 기억에 뚜렷한 것은 된장찌개나 청국장찌개였다. 막 끓여진 된장찌개는 소반 위에 자리를 잡아 올라오고 나서도 계속 보골보골 끓고 있었다. 어머니가 간혹 청국장찌개라도 끓이시면 우리 형제는 코를 틀어막고 "이게 무슨 냄새냐"며 손사래를 쳤다. 아버지의 소반 위에 찌개 외에 반찬은 세 가지를 넘는 적이 없었다. 그것은 으레 김치와 생선 한토막 혹은 콩자반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단출한 밥상이 결코 허술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밥상과 그릇은 정갈하다 못해 빛이 났고 번쩍이는 듯한 은수저와 은젓가락은 소박한 밥상의 그렇지 않은 품위를 나타내고 있었다. 가난하지만 기품 있는 선비의 밥상이라고 할까.
아버지는 구수한 된장찌개를 한 숟갈 뜨고 갓 지어진 쌀밥에 몇 가지 되지 않는 찬을 아주 맛있게 드셨다. 식사를 마친 아버지의 소반은 아주 깔끔했다. 단 한 방울의 찌개국물도 단 한 톨의 밥알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 토막 생선도 가시 몇 조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당시에 나는 아버지의 반찬투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간혹 가다가 내게 술을 한잔 따라오라고 시켰다. 그러면 나는 주저 없이 일어나 장식장에 있던 술병을 꺼내 유리잔 바닥에 깔릴 정도로 조심스럽게 술을 따라드리고는 했다.
그러다가 문제의 그날이 왔다. '태극당 모나카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우리 형제는 아버지가 퇴근하시면 "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 인사를 해야 했기에 대문을 미리 열어놓고 아버지의 등장을 기다렸는데 정작 그 시간에 대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와 같은 직장의 직원이었다. 자기 신분을 밝힌 그 직원은 손에 선물봉투를 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직원은 마치 다행이라는 듯이 내게 그 선물봉투를 쥐어주고는 "과자를 사 왔는데 맛있게 먹어라"하고는 마루로 올라가 아버지를 기다렸다.
변변한 군것질거리가 없던 시절이었다. 집에 있던 큰누나와 나는 건넌방에서 선물봉투에 담긴 커다란 상자를 꺼내고 뚜껑을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그 커다란 상자 안에는 개별포장되어 반짝이는 모나카가 가득 담겨있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고 아름답기조차 했다. 짧은 내 인생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고 할까. 나는 그중에 하나를 꺼내 뜯어먹으려고 했고 나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은 큰누나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는지 아버지가 오시면 허락을 받고 먹자고 나를 달랬다.
큰누나의 말을 거역할 이유가 없던 나는 "그러면 아버지가 오시면 바로 꺼내 먹자"고 마음을 다스렸지만 그날따라 아버지는 퇴근시간이 늦으셨고 아버지의 퇴근시간에 맞추어 저녁식사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는 찌개를 연탄불에 올렸다 내렸다 노심초사하셨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 그냥 하나만 먹을래" 조심스러운 큰누나의 매서운 시선을 멀리하고 반짝이는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하얀 속살 같은 모나카의 찹쌀 껍질을 베어 물었다.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씹힌 모나카의 속에는 요즘 유행하는 노래처럼 '달고 달고 달디단' 단팥이 가득 담겨있었다. 바삭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모나카의 맛이었다. 나는 하나로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아 순식간에 세 개나 먹어치우고야 말았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맛이었다.
아버지는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오셨고 벌써 몇 시간을 묵묵히 기다리던 그 직원과는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양복 상의를 옷걸이에 걸고 안방에 앉아 저녁 밥상을 기다릴 때 예의 그 직원이 조심스럽게 아버지 앞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아버지의 표정에는 어린 내 눈에 보기에도 냉철함이 묻어났다.
그렇게 어색한 상태에서 어머니가 소반을 들고 들어오셨다. 역시 하얀 쌀밥이 가득 담긴 공깃밥 한 그릇과 된장찌개가 밥상 위에 올라왔고 아버지는 묵묵히 저녁식사를 시작하셨다. 머쓱해진 그 직원은 결국 아버지에게 인사를 고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는 그 직원이 떠나고 난 후였다. 그 직원이 제과점에서 과자 한 상자를 사 왔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셨다. 그런 선물을 왜 받았냐는 것이다. 게다가 그 상자에서 허락도 없이 모나카 세 개를 뜯어먹은 나에게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것은 내가 결코 먹어서는 안 되는 모나카였던 것이었다. 그것도 태극당의 모나카.
다음날 아버지의 엄명을 받은 큰누나와 나는 사직동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 명동에 있는 태극당으로 향했다. 요즘이야 유명한 제과점이 많지만 당시에는 최고로 치던 제과점이 바로 태극당이었다. 지금 태극당은 장충동에 있지만 1946년 명동에서 창업한 태극당은 1973년도에 지금의 장충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서울 명동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모나카 열 개를 샀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열 개의 모나카에서 세 개는 어제 꺼내먹은 상자에 채워 넣고 나머지는 형제들이 하나씩 그리고도 남은 것은 어머니께 드렸다. 다시 먹어도 살살 녹는 달콤하고 행복한 맛이었다.
아버지는 다음날 다시 채운 모나카 상자를 들고 출근하셨다. 나는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공직에서 물러난 아버지는 일찌감치 귀향하셔서 지역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도우며 말년을 그곳에서 보내셨다. 아버지는 공직생활을 마치고 훈장을 받으시기도 했지만 가장 자랑스러워하셨던 상은 군민의 날에 지역군수에게서 받은 <청백리 상>이었다.
한참 무더운 8월 1일이 아버지가 소천하신 날이다. 지금쯤 아버지의 무덤 위에는 잡초가 가득할 텐데... 오늘따라 엄하시지만 웃으실 때만은 파안대소하시던 아버지의 그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