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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연 Mar 26. 2024

거북이에게도 길을 내어주세요


  수영장에 갔다. 평소와 다른 시간대에 가니 비교적 한산했다. 잠깐의 추위를 애써 견디며 물에 들어간 뒤 바로 수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른한 몸을 이끌고 수영장에 온 탓일까, 보통 맨 처음에는 그나마 힘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터라 크게 지치지 않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가는데 그날은 유독 처음부터 힘겨웠다. 첫 턴부터 그러다 보니 앞으로 수영해야 할 시간을 생각하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때 최근 책과 웹툰에서 본 내용이 떠올랐다. 이연 작가의 그림 에세이 《매일을 헤엄치는 법》에서는 '그저 빨리만 간다고 잘하는 게 아니다. 속도를 느리게 조절할 줄도 알아야 한다.'라고 했고, 해오 작가의 웹툰 《수영만화일기》에서는 '수영을 너무 빨리 하면 금방 지친다. 속도를 조절해서 천천히 수영하면 쉬지 않고 더 오래 수영할 수 있다.'라고 했다. 비슷한 두 메시지를 비슷한 시기에 접한 김에 나도 천천히 수영해 보기로 했다. 수영장에 사람이 적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펼쳐졌다. 평소보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느꼈음에도 천천히 수영하자 한결 몸이 편안해진 것이다. 원래는 레인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한 번 완주하고 나면 늘 한참을 서서 쉬었고, 그때마다 남은 숙제 더미를 바라보듯 시계를 보며 남은 시간을 계산하곤 했다. 그런데 천천히 수영하자 그다지 힘이 들지 않고 몸이 가뿐해 바로 수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자연히 시계를 보며 남은 수영 시간을 체크하는 일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동안은 잔뜩 힘주어 달리다가 숨이 차올라 쉬는 일의 연속이었는데, 쉬지 않고 바로 턴해서 수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이제 내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가다가 뒤를 돌아도 내 뒤를 바싹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 마음이 놓였고 즐겁기까지 했다. 여유롭고 평화롭고 자유로웠다.


  안타깝게도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금세 한산한 시간대가 끝나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앞사람의 여유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충분히 간격을 두고 수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뒷사람이 내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출발한 모양인지 금세 옆으로 치고 나와 나를 앞질러 갔다. 머리로는 '그래. 속도가 다르면 답답하니까 앞질러 갈 수도 있지.'라고 이해했지만 자못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그동안 천천히 수영하는 앞사람을 따라잡은 적이 많지만, 앞사람이 아예 멈춰 서서 비켜주지 않는 이상 굳이 앞질러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천천히 수영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속도를 조절하며 앞사람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나는 그 배려를 돌려받지 못했다고 느껴서인 것 같다. 그 후로도 같은 사람과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고, 마음의 여유를 잃고 조급해져 지친 나는 이만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출수하기 위해 계단이 설치된 가장자리 쪽 레인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가서 자리를 비켜주려는 와중에도 일은 일어났다. 막 출발하거나 도착하려는 사람들, 레인 끝에 서서 쉬는 사람들을 적절히 피해 얼른 지나가려는데, 그 와중에도 단 1초를 참지 못하고 비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어차피 지나가던 중이었으니 더 비키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바로 나왔지만 정말 다들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우리나라를 '국가번호 82의 나라', 우리 민족을 '빨리빨리의 민족'이라고 한다. 그렇게 모든 게 빠른 우리나라에서 나는 눈이 팽글팽글 돌아가서 정신없는 거북이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나도 기본적으로 내재된 DNA는 어쩔 수 없는지 웹사이트가 바로 열리지 않거나 앱에 오류가 생겨 버벅거리면 금세 마음이 답답해지지만, 그래도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조금 더 천천히 여유 있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품고 산다.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는 느리게 갔지만 더 멀리 갔다. 그리고 그날 나는 천천히 수영하면 지치지 않고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몸소 겪었다. 물론 토끼는 토끼의 속도대로 가면 된다. 다만 이 사회가 거북이에게도 마음 놓고 제 속도대로 갈 수 있는 길을 온전히 내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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