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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가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2)

[협성문화재단 NEWBOOK 프로젝트] 멘토링 전반부와 2번의 퇴고

by 인생정원사
아래 글과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life-gardener/212



1. 일단, 건방진 생각부터 버려야 했다.

- 자폐와 가드닝을 어떻게 합쳐야 하지?


정원이 방학 첫 날과 함께 멘토링이 시작되었다. 방학중의 나의 일과는 학교를 보내지 않아 집에서 전심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만 빼고는 평상시와 똑같았다. 9시 30분부터 12시까지 정원이는 활동지원사와 오전일과를 보내고 점심을 먹이고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오후 센터 일과 및 외부 산책 등을 했다. 물론 매일의 시간표에 따라 변동은 있다. 병원에 가야 하면 내가 따라가야 했고, 아플땐 집에서 쉬기도 했다.

멘토 작가님도 현역 소설가셨고, 방학중인 정원이를 케어하면서 서로 바로바로 통화는 어려웠다. 마침 정원이가 있을 때, 멘토의 전화를 받았다. 길고 정확한 통화가 어려워 사정을 설명드리고 메일로 소통했다. 그래서 통화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이후에는 문자와 메일로 소통했다. 글과 메일이 보다 분명하게 의도를 전달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사에서 일할 때,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것은 합의된 의사소통은 맞춰가는 과정이라 배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감시간과 의도의 파악이었다. 그러나 작가의 입장이 아니라 철저히 프로듀서의 입장임을 퇴고 과정을 통해 까달았다. 하지만 시작때 만큼은 자신(?)있었다. 내가 할 이야기의 '주제'는 이미 한 방향이었다는 것.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전달하느냐의 문제였다.

멘토링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뭐 그냥 지금 글을 잘 발전시키면 되는 거란 건방진 생각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첫 메일을 받고 착각임을 깨달았다. 난 철저히 초심자의 마음을 갖기로 했다. 멘토 작가님은 심사위원 중의 한 분이셨다. 첫 메일을 자세히 밝힐 순 없지만 나의 멘토가 되길 자청하셨다고 했다. 메일에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응원하시며 면접에서 이야기 한대로 공모전에 낸 이야기에 '자폐' 이야기를 더하자 하셨다.




2. 첫번째 퇴고

ㅡ 가장 먼저 한 일은 투고 원고를 허무는 것이었다.


멘토는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그 소설의 무대는 정원이가 자란 고향이기도 했다. '운명'은 때로는 예기치 않은 우연을 낳았다. 아, 멘토링 과정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간절히 원했던 것, 정원이 이야기를 하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기존의 브런치북 <자폐를 가진 정원이의 세계>와 <느린시계의 정원>을 5부작으로 해서 투고원고를 한 것에서 필요한 <느린 시계의 정원>을 가져오기로 했다. 즉, 원고를 허물어뜨리기로 한 것이다. 남은 원고는 나중에 다시 채워나가기로 결정했다. 아깝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뻔뻔하지만 '거의 완성된 거야'란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어림도 없었다. 허물어뜨리길 정말 잘 했다.)

처음에는 정원 이야기 챕터 사이에 아이 이야기 챕터를 사이사이에 끼워넣어 보내 부터 첫멘토링을 시작했다. 심사위원들은 아직 정원이 이야기를 읽은 적이 없었기에 어떤 원고를 갖고 있는지 보여드리는 것을 먼저 하기로 했다. 일단 "이런 흐름으로 할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작가님이 지금 원고를 초고라 가정하고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주었다.


1. 목차 수정

2. 자폐 스펙트럼 관련된 이야기와 정원 이야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섞이게 수정


자신만만하게 난 2주안에 해보겠다고 했고, 결국 중간에 연장을 해 3주만에 냈다. 아이 방학중 퇴고하는 것은 무척 어렵고 개학하면 새로운 적응의 시간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쓰고싶은 나의 욕심이 오히려 이 여정을 기꺼이 해내게 했다. 아파도 쓰고, 그래서 글이 위로가 되는 밤이었다. 사기는 충만했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시야였다. 목차를 짜느라 끙끙댔고 하나의 흐름은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보내는 원고의 흐름이 매끄럽진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세밀한 기술적인 디테일이 아니라 큰 흐름이었다. 이 '이야기'가 맞게 가고 있나라는 점검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주 긴 메일을 받았다.


요지는 아래와 같았다.


1. 목차 수정 : 초반 30장을 매력적으로 하라.

2. 자폐 스펙트럼 관련된 이야기와 정원 이야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뒤섞이게 수정하라.


아, 같은 내용이었다.

혹시라도 내 사기가 꺾일까봐 칭찬섞인 피드백을 보면서 마음을 다졌다. 길고 긴 메일을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낯선 자폐의 이야기로 건너가는 다리로써의 가드닝이 유연하게 섞여야 했다. 그리고 초반 30분이 정말 매력적이어야 했다. 어떻게 써야 할까?

일단 지루했던 새로 쓴 프롤로그를 폐기했다. 다시 원래 프롤로그에 살을 붙이고 프롤로그에 맞춰 에필로그를 쓰기로 정했다. 멘토작가님이 방향성을 제시했지만 결국 이 이야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이것은 나의 원고이기에 결정은 스스로의 몫이었다.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


난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정말?




3. 두번째 퇴고

ㅡ 다시 쓰는 것이 더 빠를 것만 같았다.



두번째 퇴고 내내 메일 속의 칭찬해준 글귀를 저장해두고 계속 되뇌었다. 스스로를 믿었다.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나를 발견해주고 알아봐주심에 감동했다. 그것이 설령 고래를 춤추게 하는 칭찬일지라도 칭찬 자체가 귀했다.


멘토의 메일

정원사님의 끈기를 믿고, 또 정원사님께서도 끝까지 노력해볼 저를 믿어주기를 바라면서, 조금은 더 욕심을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저는 정원사님의 책이 세상에 꼭 필요한 책이라고 믿고 이런 초고를 쓰신 분이라면 이미 모든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드시겠지만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정말 좋은 책을 만들었음 좋겠어요. 제가 원하는 건 정원사님이 좋은 책을 내는 것, 그거 하나뿐입니다.


다시 처음부터 쓴다고 생각하고 목차를 처음부터 다시 짰다. 2주동안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총 7부작 프롤로그 포함 30부였다. 이 뼈대는 최종원고까지 그대로 갔다. 돌이켜보면 쉽지 않았다. 성격이 다른 두 원고를 적절히 섞고 흐름을 갖고 주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정말 난해했다. 머리카락이 매일 한웅큼씩 빠질 정도였다. 새로 목차를 짜서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주제를 전달하면서 선언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이었다. 한편당 최소 10번 이상 고쳐쓰면서 원고를 작성했고 보냈다.

나는 연결점을 살리고 챕터간 완결, 챕터내 완결성을 신경썼다. 따로 멘토링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내 욕심은 1권의 에세이로서 좀 더 밀도있는 '연계'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1꼭지가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편이 완성도가 있으면서 각 부별 내의 꼭지들이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지향했다. 그리고 7개의 부가 완급과 강약을 갖고 흘러갈 수 있도록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이번에는 그래도 잘 한 것이겠지? 정말 괜찮겠지?


멘토의 메일 :

보내주신 원고 잘 살펴보았어요.

정말 멋지게 해내셨네요. :)

가장 어려운 작업이라 걱정이 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잘 정돈이 된 데다 정원 이야기와 아이 이야기가 서로 잘 녹아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큰 산을 넘어왔어요. 큰 틀이 제대로 잡힌 걸로 저는 보여요.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요?


와! 성공했다!!! 기뻤다.

빠진 머리카락이 아깝지 않았다. 암요, 다음 단계 해야지요!

뭔가 큰 산을 넘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멘토의 메일 :

정원사님의 책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엮여 있는데요.

1) 정원 가꾸는 이야기 2) 아이 이야기,

이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밸런스가 잘 맞아야 하고, 분량 또한 비슷해야 하는데요.

이전보다는 밸런스가 훨씬 좋아졌어요. 특히 2-2, 2-3, 3-3은 너무 잘 고치셔서 보면서도 감탄을 했어요.

아이 이야기 쪽으로 중심축이 많이 기울어 있는 듯합니다.

전체적으로 2:1 정도 (아이 2, 정원 이야기 1) 되는 듯해요.

(중략)

해서 원고 전체 분량을 한번 살펴보았는데요.

200매 원고지 기준 476장, 글자 10포인트 기준 70매 정도더라고요.

재단에서 제시한 기준은 200자 원고지 기준 700~800매, A4 기준 70~90매였거든요.

원고지 기준으로는 많이 부족하고, A4 기준으로는 딱 들어오는 정도인데요.

분량을 보았을 때 정원 이야기를 조금 더 넣는 것이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요.

밸런스를 조금만 더 맞춰보는 게 어떨까요?


음? 분량?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A4 분량과 원고지 분량에서 미세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 초기 공모전에 낸 12포인트로 작업을 했구나.

476장. 목표는 800매. 300매가 모자랐다. 맙소사. 이미 멘토링 5주가 지났다. .... 망했구나.

이제 지난 원고에 매달리지 않고 새롭게 빈 자리에 각 챕터를 유연하게 연결할 원고를 새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한편한편 퇴고할때마다 가드닝과 자폐의 비율을 정량적으로 체크했다. 한문장이라도 넣고 묘사라도 해서 분위기를 살리려고 했다.

챕터마다 1편씩 더 추가했다. 원고는 총 37장이 되었고, 새로 써야 하는 장도 있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상태에서 분량을 늘려야 하는 일은 곧 시간 싸움이었다. 난 아무 이야기나 넣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 5주밖에 남지 않았다. 8월 말일. 아이는 아직 전학 10일차. 시간이 없었다.

다른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공저에 참여하기로 했던 프로젝트에 빠지기로 했다. 슈퍼비전도 최종원고일까지는 쉬기로 했다. 정원이를 보면서 그 모든 것을 할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단 하나 주어진 이것을 부끄럽지 않게 하고 싶었다. 아쉽고 속상했지만,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없는 스스로를 인정하기로 했다

길게 카톡하거나 누군가와 통화하거나 만나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 떨지 않고 고요히 고치고 읽고 또 다시 썼다. 주말에는 밤 열두시까지 작업실에서 쓰고 돌아와 아이 옆에 몸을 뉘였다. 정말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밤이 지나갔다. 나는 시간과 싸우면서 원고를 한 장 한 장 늘려갔다.




3. 작업실과 퇴고, 나만의 시간을 만드는 법


책쓰기는 정말 긴 호흡이었다. 가드닝으로 선정되었던 원고에 아이가 가진 자폐 이야기를 더했다. 이미 써왔던 결이 다른 글 두 뭉치를 한데 모아 옷감을 짜듯 교차하며 다듬는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고 오래 걸렸다. 현재의 목차를 바꾸고 나서 두 주제의 분량을 조율해야 했다. 그 과정은 힘들어도 즐거웠다.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살아있다는 기분이었다.

정원이와의 10년을 생각하며 썼다. 내면에 자리한 격렬한 고통을 다듬어 깎아내어 본래 말하고자 하는 바를찾으려 했다. 자폐를 가진 아이를 키우며, 해야 할 것들을 하는 것이 나의 사랑이고 의무였다. 그 사이에 틈을 내어 아이와의 삶을 전달력 있는 글로 써야 한다는 것이 그동안 무척 어려웠다. 삶을 살아가면서 쓰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니까.

퇴고는 종종 고통의 복기가 되었다.

보통의 삶이란 무엇일까. 천천히 소중한 것부터 이뤄가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겠지. 길이 없다 한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면 의미지 않을까? 길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작업실을 오가며 정원이와 생활하는 틈틈히 수정하는 시간들이 좋았다. 아이에 대해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던 1년 전의 내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나를 모르는 사람도 자폐를 모르는 사람도 식물을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도록. 누굴 비난하거나 화내거나 슬픈 이야기는 안쓰기도 하고 꼭 필요할 땐 담담하게 썼다. 화나고 속상하고 그런 일이 왜 없겠냐만은 그것이 비난이 되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려운 아이를 키우고 몸이 아프더라도, 일상은 반짝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였다.



저는 과연! 분량을 완성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



표지 사진은 제미나이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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