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에서 쓰는 두 번째 편지
안녕. 어느새 겨울이야.
너의 짙푸름을 느꼈던 무더운 여름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너의 민낯을 마주하는 겨울이 됐네. 너를 만낫던 지난 겨울은 눈이 많이 왔어. 그래서 너의 가지들은 흰 눈으로 덮여 가려졌지. 그래서 난 잘 몰랐나 봐. 네가 어떤 나무일지, 어떤 꿈을 가졌을지. 그저 너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서.
봄에는 발그레한 분홍을 품은 하얗고 아름다운 꽃이 너의 가지를 감싸안아. 이윽고 연둣빛 싹이 났을 때, 참 설레었지. 그 옅은 분홍과 연두의 전환점은 참 따듯하고 너의 공간이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졌던 나날이였어. 하루 걸러 하루, 조금씩 보아도 참 고왔어.
여름은, 선명한 초록이 진실한 하늘을 가린 채, 뜨거운 고단함을 식혀준 나날이지. 고마워. 그저 작은 시원함을 주었기에 소중한 여름이었어. 네 그늘의 공간에 들어가 그저 숨을 조금이나마 들이켜 쉬고 싶은 무더운 여정이었어. 우리가 아팠기에 서로 기댈 수밖에 없는 여름이었을까.
그리고 가을이 왔지. 가을은 참 예쁘고 또 가까웠지. 봄의 옅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풍성한 고운 마음이었어. 난 너에게 좀 더 가까이, 마주하고 싶었어. 하지만 바람이 불었어. 선명한 기억들이 차가운 바람에 하나 둘, 떨어졌어. 겨울, 봄과 여름의 기억을 담은 고운 추억들이 하나둘 희미해지네. 기억은 바닥에 놓여 뭉뜽그러진 하나의 갈색의 시절이 되었지. 마음속의 선명한 초록을 그제서야 깨닫고 난 어찌할 바를 몰랐어. 그래, 낙엽은 곧 제 빛깔을 잃고 저 아래의 땅과 같은 빛이 되어가. 그래도 낙엽을 치우지 않을 거야. 그저 놓아두고 잠시 옛 시절의 선명함을 추억해보기도 할 테지. 그래도 괜찮아.
오늘 서리가 내렸어. 이제 고유한 겨울이야. 선명했던 추억의 경계는 곧 희미해질 걸 알아. 애써 너의 여름을 묻지 않을게. 낙엽은 곧 본래의 모습을 잃고 우리의 발밑에 둔 짙은 흙이 될 거야. 그리고 다시 건강한 연둣빛 희망을 틔우겠지. 겨울의 하루에 너를 다시 만났어. 한 계절의 선명함을 기억해. 눈이 내리지 않은 오전의 겨울나무의 가지는 감정의 잎을 내려놓은 온전한 민낯이야. 비로소 깨달았어. 선명한 초록이 나의 마음이기도 했단 걸. 아름다움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서리 맞은 낙엽이라 서러워하지 말아.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그저 거름이 되어 부엽토가 되면 충분하거든. 우리의 사계절이 연둣빛 다가올 봄의 경험이 되면 그걸로 괜찮아. 시간은 약이니까.
안녕, 또 만나.
그저 계절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서 평안과 위로를 얻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지요. 부엽토는 일종의 <심상화>에요. 모든 감정은 낙엽이 되어 떨어져 결국 거름이 된다. 그래서 새봄을 맞이할 준비가 된다. 고정되어 있는 감정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흘러갑니다. 애써 잡을 필요는 없어요. 인연이라면 다시 새봄이 되어 만날 수 있을테지요.
표지출처: 픽사베이
photo by 인생정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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