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수신인 불명으로.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 사이에서 미끄러진다
(마르셀 프루스트)
안녕? 네가 말했던 장소에 가봤어. 좋더라. 하늘은 푸르고, 물빛은 멀리서 조용히 반짝였어.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한데 사람이 아무도 안 지나가더라. 혼자 갈 순 없어서 아이랑 갔는데 난 편안했고, 아이는 자유로웠어. 아무도 우릴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아서 조금 숨이 트였거든. 숨이 트이니 어깨도 가벼워졌어. 무더운 여름의 주말. 너무 답답해서 나왔는데, 전에 이야기해 준 곳이 갑자기 생각나서 무작정 와봤네.
아마 넌 여기서 뛰었겠지? 뛰면서 진정으로 고유한 혼자가 되었겠지. 상상하니 조금 부러워졌어. 난 아이 손을 잡고 걷다가 앉았어. 아이의 손은 흙을 문지르고, 난 바람을 느꼈어. 꺾인 풀향이 내 코끝을 스쳐 네가 있던 시간의 틈으로 스며들어. 그래, 우리의 시간은 서로 비껴갔지. 네가 보냈던 시간의 틈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더라. 뜨거운 열두 시의 태양인데, 그늘은 시원해서 아이도 웃었어. 눈앞이 탁 트이니, 마음도 트이더라. 고마워, 너만의 장소를 알려줘서.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었어. 그게 오늘이네.
그거 아니? 때로는 같이 있어도 외로운 거 같아. 혼자 있을 수 없기에 더 추웠던 거 같아. 오늘의 난 여기 있으니, 10년 전의 난 여기 올 수 없겠지. 10년이란 시간의 틈에서 우린 만날 수 없을 거야. 어제는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니까. 눈을 감고 아침이 와서 다시 눈을 뜨면, “오늘“도 그저 기억이 되어버리잖아.
어느새 답답함이 사라져서 다시 집으로 가. 난 “생활“을 해야 해. 삶이란 먹고 자고 쉬고 일하는 것도 중요하거든. 공간은 함께 보내면서 공유할 수 있고, 마음은 떨어져 있어도 기억을 나눌 수 있지. 하지만 말이야, 시간은 아무하고도 나눌 수 없어. 그건 내 거거든. 그냥 각자의 무수한 시간들이 그저 서로 켜켜이 만났다 흩어지며, 기억을 만들어가지. 기억의 틈에 있는 네게, 네가 달렸던 길 위에서 나는 앉아서 이 편지를 써봤어.
안녕, 또 만나.
때로는 수신인 불명의 편지를 무작정 써봅니다. 그 편지는 과거의 어느 순간의 나를 위로하기도 하지요. 혹은 기억 속의 누군가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이기도 할 겁니다. 때때로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응원일 수도 있어요. 오늘의 내가 편지를 쓰고, 내일의 내가 받아본다면, 스스로에 대한 응원을 나눌 수 있겠지요.
photo by 인생정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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