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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정원사 Nov 27. 2024

시간의 틈에 앉아 편지를 쓰다

때로는 수신인 불명으로.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 사이에서 미끄러진다
(마르셀 프루스트)


안녕? 네가 말했던 장소에 가봤어. 좋더라. 하늘은 푸르고, 물빛은 멀리서 조용히 반짝였어.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한데 사람이 아무도 안 지나가더라. 혼자 갈 순 없어서 아이랑 갔는데 난 편안했고, 아이는 자유로웠어. 아무도 우릴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아서 조금 숨이 트였거든. 숨이 트이니 어깨도 가벼워졌어. 무더운 여름의 주말. 너무 답답해서 나왔는데, 전에 이야기해 준 곳이 갑자기 생각나서 무작정 와봤네.


아마 넌 여기서 뛰었겠지? 뛰면서 진정으로 고유한 혼자가 되었겠지. 상상하니 조금 부러워졌어. 난 아이 손을 잡고 걷다가 앉았어. 아이의 손은 흙을 문지르고, 난 바람을 느꼈어. 꺾인 풀향이 내 코끝을 스쳐 네가 있던 시간의 틈으로 스며들어. 그래, 우리의 시간은 서로 비껴갔지. 네가 보냈던 시간의 틈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더라. 뜨거운 열두 시의 태양인데, 그늘은 시원해서 아이도 웃었어. 눈앞이 탁 트이니, 마음도 트이더라. 고마워, 너만의 장소를 알려줘서.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었어. 그게 오늘이네.


그거 아니? 때로는 같이 있어도 외로운 거 같아. 혼자 있을 수 없기에 더 추웠던 거 같아. 오늘의 난 여기 있으니, 10년 전의 난 여기 올 수 없겠지. 10년이란 시간의 틈에서 우린 만날 수 없을 거야. 어제는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니까. 눈을 감고 아침이 와서 다시 눈을 뜨면, “오늘“도 그저 기억이 되어버리잖아.


어느새 답답함이 사라져서 다시 집으로 가. 난 “생활“을 해야 해. 삶이란 먹고 자고 쉬고 일하는 것도 중요하거든. 공간은 함께 보내면서 공유할 수 있고, 마음은 떨어져 있어도 기억을 나눌 수 있지. 하지만 말이야, 시간은 아무하고도 나눌 수 없어. 그건 내 거거든. 그냥 각자의 무수한 시간들이 그저 서로 켜켜이 만났다 흩어지며, 기억을 만들어가지. 기억의 틈에 있는 네게, 네가 달렸던 길 위에서 나는 앉아서 이 편지를 써봤어.


안녕, 또 만나.




때로는 수신인 불명의 편지를 무작정 써봅니다. 그 편지는 과거의 어느 순간의 나를 위로하기도 하지요. 혹은 기억 속의 누군가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이기도 할 겁니다. 때때로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응원일 수도 있어요. 오늘의 내가 편지를 쓰고, 내일의 내가 받아본다면, 스스로에 대한 응원을 나눌 수 있겠지요.


photo by 인생정원사 


이어지는글: 

1. 시간의 틈에 앉아 편지를 쓰다

2. 겨울나무, 서리 맞은 낙엽이라 서러워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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