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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Feb 13. 2024

당신의 봄을 주세요

(그리움이 희망에게)

 봄을 좋아하는 나는 입춘에 태어났다.

입춘은 24 절기의 첫째로 봄의 시작을 알린다. 입춘에는 한 해의 무사태평과 풍농을 기원하고 봄이 시작되었음을 자축하기 위해 대문과 기둥 또는 벽에 입춘 첩을 써서 붙였다. 입춘 첩 문구라면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시작되면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긴다) 정도가 될 것이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파베리아, 파주의 추위도 이제는 끝을 향하고 있다. 달력 한 장 넘겨 새달을 맞이했을 뿐인데 햇살이 따스한 걸 보니 절기를 구분한 옛 선조들의 지혜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아직 이르지만 물고기자리 뒷마당에 나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되살아나는 조팝나무와 눈을 맞추었다. 연초록 새싹이 돋고 줄기를 따라 올망졸망 매달려 하얀 꽃을 한가득 피울 모습을 떠올렸다. 너무 이른 기대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조팝꽃이 보고 싶은 마음은 벌써 두근거린다.

 “어쩜, 너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구나.”

 때가 되면 다 나오는 이치라지만 긴 겨울을 잘 이겨낸 나무들이 새싹 틔우려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대견스럽고 고마워져서 나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차례차례 싹을 틔워줄 사과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 화살나무, 모과나무와도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운 이름들


 폐암 뇌 전이로 12번의 방사능 치료를 받고 4년이 지난 남편이 먹는 항암제만으로 한겨울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잘 보내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반대로 방사능 치료의 후유증으로 소뇌 기능에 문제가 생겨 근육긴장이 저하되고 걸을 때 몸통의 운동 조절 장애가 생겨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진 건 여전히 걱정이었다. 찬 바람이라도 잦아들어야 느린 산책이라도 할 텐데 겨울의 끝은 어디일까?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은 탓인지 생각이 단순해지고 모든 일이 귀찮아진 남편은 깊은 대화도 멈추었다. 장시간 차를 타는 게 힘들어진 남편 때문에 시댁인 상주에 내려가지 못한 채 몇 해가 흘렀다. 간간이 전화기에 들려오는 목소리로 늙어가시는 어머님 모습을 그리며 눈물짓는 남편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5년 전 운전이 가능할 때 “엄마 생신이니까 벚꽃 구경하고 바다도 보고 맛있는 것 먹고 올게.” 하며 다녀왔던 영덕 여행, 시어머니와의 데이트 사진이었다.

 시간만 속절없이 흘렀다. 아들은 조금씩 더 불편해졌고, 노모는 늙어가고 있다. 벚꽃 만개한 고속도로를 내달리며 소녀처럼 행복해했을 어머님의 마음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다. 막내아들 사랑이 남다른 시어머니에게는 자랑이었다. 딸 없는 엄마의 서운함을 살가움으로 가득 채워진 귀한 아들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엄마가 좋긴 좋은가보다. 눈물 많은 어머님은 푸른 바다 반짝거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말 없는 눈물을 얼마나 삼키셨을까?

따뜻한 봄이 오면 올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쉬엄쉬엄 내려가 어머님 얼굴 뵙자고 약속을 해본다. 만사가 귀찮아진 남편은 그러겠다고 억지 대답을 한다.


 밥을 안친다. 쌀뜨물을 받아 어머니의 된장을 풀고, 깨끗이 씻어둔 냉이를 먹기 좋게 자른다. 팽이버섯, 대파, 두부, 청양고추 하나 넣고 봄내음 가득한 된장찌개를 바글바글 끓인다. 노지에서 겨울을 보내어 속이 들지 못한 배추, 잎이 옆으로 퍼져있고, 알배기 배추에 비해 조금 억세긴 하지만 고소한 맛에 엄지척 해줄 봄동을 깨끗이 씻는다. 무 한 채칼 썰어 고춧가루, 간장, 매실액, 식초, 마늘, 참기름을 넣어 새콤달콤 맛깔스럽게 무쳤다. 너른 그릇에 밥 한 공기, 봄동 무침 한가득, 고추장 한 스푼은 덤, 냉이 된장찌개 한 스푼 넣어 쓱쓱 비벼 먹는다. 밥숟가락이 바빠지는 시간, 어머님을 만나러 갈 남편의 봄도 이렇게 빨리 와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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