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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Oct 31. 2024

카미노 블루

(블루는 모든 거리의 색이다.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는 한때 ‘블루’의 화가였다. 절진한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Carlos Casagemas)의 자살로 시작된 피카소의 블루 시기(The Blue Period, 1901-1904) 작품들은 내면의 깊은 슬픔과 상실감을 짐작하게 한다. 이 시기는 피카소 예술적 감성의 전환점이 되었다. 피카소는 주로 푸른색 계열의 색채를 사용해 어려운 삶의 모습을 반영했다.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그리며 인간의 고통과 비극의 이면을 캔버스에 담았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박물관에서 마주한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초상화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피카소의 창작 여정을 가득 채운 아픔과 인간의 연약함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졌다. 푸른색의 고요한 깊이는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푸른색의 상징, 하늘과 바다는 무한한 가능성과 꿈을 떠올리게 한다.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던 아득한 감정까지 끌어올린다. 그래서 슬프거나 쓸쓸한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블루’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블루는 깊은 감정에 뿌리내린 그리움의 색이다.

 ‘카미노 블루(Camino Blue)’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순례길을 걷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그리움, 다시 순례길로 돌아가고 싶은 내면의 욕망을 함께 표현하는 말이다. 나 역시 순례길 여정의 자유로움과 평온함, 나 자신과 마주했던 시간 그리고 함께 걸었던 친구들이 무척 그립다. 모든 기억이 아득해질수록 그 길로 돌아가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길 위에서 마주하는 하늘과 꽃들, 바람과 햇살, 자연의 모든 소리와 길 위의 사람들, 이 벗들 덕분에 행복했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고마운 순간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았다. 내가 두 번의 카미노를 걷게 된 이유다. 

 첫 번째 여정은 2023년 10월, 스페인의 프리미티보 길, 산악지대와 자갈길을 걸었다. 비 내리는 날이 절반을 넘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매일 새날을 맞이하는 것처럼 설렜다. 비가 쏟아지던 날 물에 젖은 나뭇잎과 흙길 속에서 찾아온 고요함,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경이로움 속에서 나 자신과 깊이 마주했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불안과 걱정이 비와 함께 씻겨 내려갔다. 프리미티보 길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길 위에서 찾은 평온은 카미노 블루처럼 진하고 깊었다.

 두 번째 여정은 2024년 8월, 포르투갈의 여름 해안 길이었다. 프리미티보 길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머릿속은 텅 비었고, 다시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면 숨통이 확 트였다. 일찍 숙소에 도착한 날에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닷물 속에 몸을 맡기며 진정한 해방감을 느꼈다. 근심은 모두 바다로 흘려보냈다. 해안 길에서 만난 나의 블루는 자유였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바쁜 일상은 길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두 번의 여정에서 얻은 자신감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길 위에서 보냈던 순간들이 꿈처럼 아련해졌다. 그리움과 함께 오는 깊은 공허감, 이 감정을 카미노 블루라고 부른다. 

 길 위에서 느꼈던 평온함과 자유로움이 일상에 스며들기를 바랐다. 현실에 갇혀 있지만, 마음속으로 길 위의 행복을 매일 되새겼다. 나의 삶 자체가 카미노가 되기를 희망했다.

 모두 잠든 이른 아침 5시, 나만의 소중한 시간이다. 고요함 속에서 온전한 나와 마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단골로 오시는 정 소피아 선생님께서 나의 두 번째 산티아고 여정이 궁금해 다녀가시며 건넨 책을 펼쳤다. 이해인 수녀님의 단상집 ‘소중한 보물들’ 언제나 맑고 밝은 수녀님의 글은 나에게 위로가 된다. 사진 속에 보이는 해인 글방은 하루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곳은 어떤 향기로 가득할까 상상해 보았다.

 책 속에서 만난 ‘평상심(平常心)’은 마음의 평화를 상징한다. 물처럼 잔잔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 평상심은 매일 갈고닦아야 한다는 글귀에 나도 큰 숨을 뱉어 마음을 다잡았다. 카미노 블루, 그 길에서 느꼈던 자유로움이 내 안에서 깨어났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남편을 보듬고 아이들과 욕심 없는 대화를 나누며 세상과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했다.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달렸다. 오늘도 길 위에서 느꼈던 행복을 일상에 녹여보자, 다짐하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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