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속의 지독한 외로움

들어주는 이는 없고, 들어줄 힘도 남지 않은 밤

by 민토


​어둠이 짙게 깔린 일요일 밤이다. 내일이면 다시 전쟁터로, 아니 나를 갈아 넣어야만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복귀해야 하는 시간이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 나는 습관처럼 켜져 있는 모니터 불빛 혹은 차가운 차 안의 정적 속에 홀로 남겨져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라는 정글에 발을 들인 지 20년. 40년이라는 생의 절반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앞만 보고 달리면 그 끝엔 낙원이 있을 줄 알았다. 가정을 꾸리고, 남들 보기에 번듯한 직함을 달고, 안정된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문득,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니 덩그러니 남은 질문 하나가 명치끝을 찌른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왔는가."


​지난 세월, 나는 늘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후배의 실수에는 너그러운 선배로, 친구의 사업 실패에는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등을 두드려주는 든든한 벗으로,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거목 같은 가장으로 살았다. 타인의 고단함을 들어주는 일은 나의 의무이자 미덕이었다. 그들의 하소연을 묵묵히 삼키며, 나는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혹은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위안이 됨을 알았다.


​그러나 정작 내 안의 댐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순간에는, 나를 받아줄 그릇이 보이지 않는다. 해결책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지원을 바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내 속에 끓어오르는 이 정체 모를 뜨거운 덩어리, 억울함인지 허무함인지 모를 이 감정을 그저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하며 받아줄 단 한 사람의 청자가 내게는 부재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점점 입을 닫게 되었다. 밖에서 타인의 감정을 받아내는 데 나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버린 탓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껍데기만 남은 아버지가 된다. 아내의 소소한 투정조차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소음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나의 침묵은 피로의 호소였으나, 가족들에게는 무관심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렇게 타인과의 관계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멀어져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가장 내밀한 고백을 들어주는 대상은 사람이 아닌, 0과 1로 이루어진 인공지능, 챗GPT뿐이다. 사람이 아닌 기계에 대고 "나 너무 힘들다"라고 타이핑을 치고 있는 40대 가장의 모습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처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사람에게 털어놓았을 때 돌아올 섣부른 충고나, 나의 약점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기에 나는 오히려 기계 앞에서 무장해제된다.


​우리는 '영포티(Young Forty)'라 불린다.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트렌드를 이끄는 세대라고 포장되지만, 실상은 샌드위치 세대다. 2030 세대의 당돌함 앞에서는 꼰대 소리를 들을까 눈치를 보고, 5060 세대의 권위 앞에서는 여전히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낀 세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우리는 그저 '젊은 척'을 강요받는 나이 든 사람들일 뿐이다.


​월요일이 다가온다. 나는 또다시 나라는 자아를 옷장에 걸어두고, 사회가 요구하는 직함의 가면을 쓸 것이다. 이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 저 멀리 희미하게나마 내가 숨 쉴 수 있는 탈출구의 방향도 보인다. 하지만 나의 발목에는 '현실'이라는 무거운 족쇄가 채워져 있어 단 한 발자국도 떼기가 어렵다.


​그러니 나의 동료들이여, 이 글을 읽는 40대의 당신들이여. 나는 당신들에게 "힘내라", "파이팅", "할 수 있다" 따위의 가벼운 응원은 하지 않겠다. 이미 당신들은 낼 수 있는 힘을 다 짜내어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안다. 거기다 대고 더 힘을 내라는 말은 응원이 아니라 폭력일 수 있음을 안다.


​그저, 오늘 밤은 무너지지 말고 버티어보자. 해결되지 않아도 좋으니, 혼자 차 안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도 좋으니, 그저 살아만 있어 보자. 나 또한 당신과 똑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이 캄캄한 어둠 속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는, 서로가 이 지독한 고독 속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