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마음의 보물창고를 다시 열며
요즘의 나는 마치 거친 파도에 휩쓸려 방향을 잃은 난파선의 조각 같았다. 눈을 뜨면 밀려오는 일상의 파도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얻어맞고, 숨만 간신히 붙인 채 하루라는 시간을 그저 ‘버텨내고’ 있었다. 20대 시절,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 넘쳐흐르던 그 객기와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해버린 것일까. 거울 속에 비친 나는 그저 죽는 날만 기다리는 늙은 짐승처럼 초라했다. 직장이라는 울타리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굶어 죽을 것처럼 전전긍긍하고, “이제 내 능력은 여기까지야”라며 스스로 한계를 긋고 그 좁은 감옥 안에 나를 가두고 있었다.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는 꽉 막힌 도로 위에 갇힌 기분. 그것이 나의 매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망치듯 홀로 온천을 찾았다. 뜨거운 탕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주변의 소음이 물소리에 묻히고, 오로지 나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귀를 울렸다. 벌거벗은 몸. 직함도, 아버지라는 이름도, 남편이라는 책임도 모두 탈의실 옷장에 구겨 넣고 오직 살덩어리인 ‘나’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굳어있던 근육을 풀어주듯,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빗장을 스르르 녹여낸 것일까.
갑자기, 정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았다. 그것은 근거 없는 낙관도 아니었고, 현실 도피성 망상도 아니었다. 아주 묵직하고 단단한, ‘자신감’이라는 이름의 파도였다.
“다 이겨낼 수 있다. 별것 아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어떤 외부의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로또에 당첨된 것도, 승진한 것도, 누군가의 칭찬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탕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내가 처한 모든 힘든 상황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에너지가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매일 죽상을 하고 다니던 내가, 갑자기 왜?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거대한 힘은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래부터 내 안에 있었다. 20년 전 신입사원 시절의 패기도, 첫아이를 안았을 때의 벅찬 책임감도, 세상을 향해 주먹질을 해대던 용기도, 사실은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두려움도, 지친 마음도, 기댈 곳 없는 외로움도 단숨에 베어버릴 수 있는 그 날 선 검(劍)이 내 가슴 속 칼집에 여전히 꽂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 40대 가장들의 삶을 돌아본다. 우리는 관계 속에 처한 역할의 무게에 짓눌려 산다. 회사에서는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에서, 집에서는 아내와 자식, 그리고 부모님 사이에서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조율하며 나를 지운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외투를 입고 있느라, 정작 그 안에 있는 ‘나’라는 사람의 알맹이는 돌보지 못했다.
우리는 마음의 빈곤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진짜 가난해서가 아니다. 우리 가슴 속 깊은 곳, 저 먼지 쌓인 다락방에는 엄청난 마음의 재산들이 쌓여 있다. 젊은 날의 열정,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 굳건한 의지,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그 귀한 보물들을 우리는 “지금은 먹고사는 게 급해”, “가장이 무슨 자아타령이야”라는 핑계로 다락방 구석에 처박아두고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그리고는 텅 빈 거실에 앉아 “나는 왜 이렇게 가진 게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할까”라며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다락방의 문을 열어야 할 때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다. 쓸모없는 걱정, 남들의 시선에 대한 공포,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강박. 이 무겁고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 우리 마음의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어, 정작 꺼내 써야 할 다락방의 보물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안 쓰는 물건을 ‘당근마켓’에 내다 팔아 비우듯, 우리 마음의 짐들도 과감하게 처분해야 한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걱정은 ‘무료 나눔’으로 던져버려라.
“퇴직하면 어쩌지?”라는 아직 오지 않은 공포는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내다 버려라.
“나는 좋은 아빠여야 해”라는 강박은 잠시 ‘거래 완료’로 돌려놓고 내려놓아라.
그렇게 마음의 공간을 확보한 뒤, 먼지 쌓인 다락방으로 올라가자. 그곳에 웅크리고 있던 나를 흔들어 깨우자. 온천에서 내가 느꼈던 그 뜨거운 자신감처럼, 당신의 안에도 분명히 있다. 상황이 변하기를 기다리지 마라. 로또가 되기를, 상사가 바뀌기를, 경기가 좋아지기를 기다리지 마라.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을 대하는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변할 수 있다.
이 글은 내가 느꼈던 감정의 기록이며, 나와 갇은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따뜻한 진심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불어오는 그 뜬금없는 자신감의 파도를. 그것은 신이 준 선물이 아니라, 당신이 지난 40년간 치열하게 살아오며 당신의 영혼 속에 적립해 둔, 당신도 모르는 ‘비상금’이자 ‘숨겨진 재산’이다.
그러니 기죽지 마라, 나의 40대 전우 들이여.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다만 다락방 열쇠를 어디에 뒀는지 잠시 까먹었을 뿐이다. 오늘 밤,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열쇠를 찾아보자. 시동이 꺼진 차 안이든, 김이 서린 욕실이든 상관없다. 내 안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분명히 보일 것이다. 여전히 뜨겁게 뛰고 있는, 녹슬지 않은 당신의 심장이.
함께 이겨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