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향인스러운 내향성 엄마의 극 내향성 아들
내가 스스로를 내향인이라고 하면 주변에 나를 아는 몇몇은 '풋'하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나의 내향적인 성향을 알아보는 친구도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적극적인 태도, 빠른 결단력과 실행력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나를 외향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국민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의 내 짝은 나를 참 많이 괴롭혔다. 남자아이였고 이름도 기억한다. 친구들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자동차가 내 책상을 가로질러 바닥에 떨어지면 나에게 주워오라고 시켰다.
1학년 때 다닌 학교는 교육대학교의 부속 국민학교였는데 점심 급식이 있었다. 하루는 점심 종이 치자마자 학교 식당으로 달려가 줄을 섰다. 달리기가 빨랐던 나는 꽤 앞에 줄을 설 수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짝이었던 남자아이는 줄에서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나를 줄 밖으로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오도 가도 못하던 나를 한 남자아이가 자기 앞으로 오라고 손짓하며 세워줬다.
그렇게 괴로웠던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가면서 첫 등교하는 날 나는 결심했다. 다시 그렇게 당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캐릭터를 바꿔 조금은 와일드하게 행동하고 목소리를 높여 자기주장을 하려고 했다.
그렇다고 타고난 성격이 아주 바뀐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에도 누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해지면 농담도 잘하고, 꽤 웃기는 사람이지만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나를 '차도녀'라고 인식했다.
직장 생활을 할 때 가깝지 않은 선생님들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는 쌀을 씹는 건지 모래를 씹는 건지 영 껄끄러웠다. 아무도 나를 따돌리지 않아도 '혼자'가 편했다. 혼영, 혼밥이라는 말이 없던 스무 살부터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밥을 먹었던 나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향인인 아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해는 하지만 엄마로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어찌 되었든 내성적인 내향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도 잘 알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13일에 방영된 EBS의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를 우연히! 며칠 전에 보게 되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제 미래에 벌어질 심리적 동요까지 예측하고 영상을 띄우는 지경에 이르렀나 보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내향인보다는 외향인을 선호한다. 취업 면접에서도 쩔쩔매는 사람보다는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잘하는 사람이 높은 점수를 받게 마련이다. 흔히 외향인은 진취적이고 사교적이며 리더십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큐에서는 내향인의 잠재력에 대해 다루며 내향적인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다. 버락 오바마나 빌 게이츠, 워런 버핏도 모두 내향인이라고 한다. 골똘히 연구를 해야 하는 직업의 경우 외향인 보다는 내향인의 강점이 빛을 보인다고도 다큐에서는 말한다.
아들이 더 어렸을 때 친정 엄마는 '소심하다'라고 걱정했고, 친정 아빠는 만날 때마다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며 '씩씩해져라'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부모님의 마음도 이해한다. 내성적인 손자가 사회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봐 걱정을 하실 수 있다.
하지만 내향적인 사람에게 더 적극적이 되라고 하거나, 씩씩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존재를 부정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존재의 부정은 수치심의 씨앗이다.
나도 내향인이면서 아들의 내향적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던 적이 있었다. 솔직히 답답한 적도 많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왁자지껄 모여 놀 때에도 아들은 혼자 또는 친구 한 명과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많이 봤다.
오늘 아들의 세컨더리(캐나다의 중고등학교)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학교로 찾아가니 많은 학부모들이 건물 로비에서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 틈에 껴서 학교 내부와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의 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떠들고 까부는 많은 아이들 사이에 고독하게 섬처럼 우뚝 서 있는 아이가 나의 아들이었다.
아, 역시 혼자구나.
본능적으로 혼자 있는 다른 아이들을 찾아보았다. 당연히 나의 아들처럼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들도 여러 명이 보였다.
외딴섬처럼 혼자 서 있는 저 기분 나도 너무나 잘 안다. 그렇기에 아들에게 "씩씩해져라."라고 하거나 친구들을 적극적으로 사귀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내가 필요로 인해서 외향적인 부분을 개발했듯이 아들 역시 본인이 필요해지면 외향인으로 오인받을 만한 소셜 스킬을 갖도록 애를 쓸 것이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그랬기에, 내향적인 아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한다.
표지그림 : 아들의 엘레멘터리 졸업 카드로 내가 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