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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주리 May 03. 2023

감사일기

수요일의 깔딱고개( 깔딱수)


회사 창립 46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왔다. 1977년생이다. 내가 다닌 회사가 참 오래된 회사였구나! 자부심이 생겼다. 30년 근속상을 받은 선배가 계셨다. 소감에 울컥했다.

"문주리는 이 일을 얼마나 하셨나요?"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한참을 생각한다. 누가 나이를 물어봤을 때 바로 말을 못 할 때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일을 .... 1998년에 시작했다고 하면 다들 깜짝 놀란다. 20세기에 시작한 일을 여태 한다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니 희한하게 본다. 무슨 일을 25년이나 했냐고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같은 일을 한건 아니다.

처음엔 교사 생활 5년 정도 하다가 아이를 낳으러 들어가서 4년 정도 쉬었다. 쉬다가 다시 일하라고 불러준 친구가 있어서 감사해하면서 재입사를 했다. 그때부터 9년 정도 일하다가 조직장 면접 2번 떨어지고 세 번 만에 붙어서 지구장으로 발령받았다. 지구장은 교사로 다니던 지국에서 포지션만 바뀌어서 관리자로 일을 하게 되었다. 책상만 옮긴 것이다. 업무는 교사 때보다 많아지고, 책임은 몇 배가 늘어났고, 월급은 늘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장은 정사원이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한다. 업무량이 많아져서 힘들고, 교사 코칭까지 해야 한다. 팀장일 때는 동료였는데, 조직장이 되니 상사가 된 것이다. 불편해하는 사람, 협조적인 사람, 치사한 사람, 고마운 사람이 나뉘는 것이다. 잘 지냈던 사람이 돌변하고,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사람이 도움을 줬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응이 빠르지 않아서 힘이 들었었다. 매달 오는 마감 줄다리기는 버거움으로 다가왔다.

지구장 업무도 어느 정도 하니까 할만했다. 그것을 어찌 알았는지 위에서는 지국장으로 승진시켜서 강동지역 반을 맡아서 일을 시켰다. 집에서 30분 거리에 떨어졌지만 마음은 천리만리 떨어진듯했다. 책임감은 지구장 보다 더 해야 했다. 지국을 책임져야 했다. 사무실 살림, 임대, 관리 정산, 운영까지 교사를 뽑는 일도 해야 했다.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초반엔 매일 울고 다녔다.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업무 사원이 있지만, 내가 상사인데 의지를 한다는 게 말이 되질 않았다. 심지어 오래된 교사들의 신임 지국장을 대놓고 왕따를 하는 느낌이었다. 내 편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여동생을 불렀다. 당장 수업을 해야 하는데 인수인계할 교사가 없었다. 급해서 잠깐만 도와달라고 해서 왔는데, 몇 년째 다니고 있다. 든든한 내 오른팔이다. 처음엔 미숙한 교사였다. 뭣도 모르고 다니더니 지금은 베테랑 교사가 다 됐다. 내 편이 생기면서 기운을 얻었다. 알바몬, 잡코리아, 알바천국... 사람을 구하는 사이트는 전부 광고를 올리고 선생님을 뽑았다. 좋은 사람을 뽑아야 했다. 열심히 했더니 회사에서 위탁 전문 지국장이라고 강의도 하고 다닌다.

지국에서 텃새 부리고 분위기 망치는 사람이 그만둔다고 할 때 절대 잡지 않았다. 바로 새로운 사람으로 채웠다. 그랬더니 지국에서 오래된 선배 선생님들이 슬슬 말을 듣기 시작했다. 지국장이 호락호락해 보였는데, 교사를 잘 뽑아서 교육하는 것이 배가 아프다고 했다. 신입한테만 애정을 쏟는 지국장에게 말도 못 하고 뒤에서 투덜거렸다. 앞에서 대놓고 말하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신입들은 지국장 말을 잘 들었다. 배운 대로 일을 했다. 어떤 꼼수도 통하지 않았다.

지금도 내 업무의 반은 교사를 뽑고 가르치는 일을 한다.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처음에는 서툴러서 여러 명을 집에 보냈다. 지국장이 처음이라 그들도 힘이 들었으리라. 지금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버틸만하다. 새로운 사람과 합을 맞추는 일이 긴장되고 조심스럽다. 꼰대 냄새가 날까 봐, 물렁해 보일까 봐, 무서워 보일까 봐 항상 신경 쓰인다. 그래도 내 사람 챙기기는 자신 있다. 그들과 함께 내가 자라는 기분이다.

글 읽고, 글쓰기 평생 안 해도 사는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내가 힘든 이유를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무식한 사람에게 배울 게 없어서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치열하게 살게 한다. 새벽에 벌떡 일어날 이유였다. 이제라도 알아서 감사하다.

내 로또보다 더 귀한 동생이 없었다면, 신입교사가 적당한 때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또 다른 위기가 있었겠지. 하지만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고 했다.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기적을 믿는다. 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도 난 감사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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