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생의 클라이밍 일기 - 프롤로그
“지금 영하 9도야. 진짜 갈 거야?”
남편이 물었다. 나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여보, 실내에서 하는데 무슨 상관이야. 클라이밍은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잖아.
차에 시동을 걸었다. 마음은 벌써 암장에 도착했지만 빨간색 신호등이 자꾸 나를 붙잡았다. 신호등을 노려보며 손가락을 천천히 굽혔다 폈다. 어깨와 손목도 돌렸다. 컨디션 나쁘지 않은데? 이대로라면 오늘 10b를 완등할 수 있을지도? 기대감에 조금 설렜다.
지구력 10b 문제는 할 만했으나 완등은 어려운, 내 수준에 약간 벅찬 문제였다. 이번 달 초 센터장님이 지구력 인터벌 트레이닝 방법을 알려주면서 10b로 해보자고 했다.
“선생님, 저 그냥도 완등 못 하는데 인터벌로 할 수 있을까요?”
“크럭스 부분을 근처에 있는 쉬운 홀드로 바꾸고, 갈 수 있는 홀드까지만 가면 돼요.”
그렇게 난이도를 살짝 낮춰서 트레이닝했었다. 할수록 시간이 단축되었고 동작도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3주가 지났다. 트레이닝했으니 강해지지 않았을까? 혹시 원래 루트로 끝까지 완등할 수 있지 않을까? 슬금슬금 궁금한 마음이 일던 때였다. 암장 SNS에 공지가 떴다. 세팅으로 인해 휴무를 하며, 지구력 문제가 일부 변경될 예정이라는 것.
뭐? 지구력 문제가 바뀐다고?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한정판 판매! 품절 시 재입고 계획 없음! 서두르세요!
사고 싶은 물건이 품절 임박이라는 소식을 듣는 기분이랄까.
자연 암벽이야 몇십 년이 지나도 그 상태 그대로 나를 기다리지만, 실내 클라이밍장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홀드를 다 떼어 내고 새롭게 붙인다. 오늘이 지나면 저 문제는 사라지고 마는 것. 다시 살 수 없는 상품 앞에서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여는 소비자가 되어 10b를 꼭 정석으로 완등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볼더링 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지구력 벽 앞에 자리 잡았다. 이미 두세 명의 남자들이 번갈아 가며 지구력을 하고 있었다.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 비장한 각오로 벽에 올랐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발이 살짝 미끄러지며 바닥에 닿고 말았다. 계속 진행해 보았다. 트레이닝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완등 홀드까지 잡을 수 있었다. 벽에서 내려오자 안경 낀 남자분이 말했다. 나와 같은 10b를 도전하던 사람이었다.
“발만 안 미끄러지면 완등하겠는데요.”
“그러니까요. 정말 짜증 나요.”
조금 쉬었다 다시 올랐다. 완등해야 해. 오늘이 마지막이란 말이야.
또 발이 미끄러졌다. 발, 발, 이놈의 발. 클라이머는 발을 잘 써야 하건만. 어려운 건 다 해 놓고 왜 자꾸 발이 미끄러지는 거야?
숨은 차지, 약은 오르지, 한참을 씩씩거렸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지구력이 처음인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암장 대여화를 신고 있는 걸 보니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분 같았다. 짜증을 옆에 내려놓고 친절을 꺼냈다.
“홀드 옆에 붙은 테이프에 숫자가 쓰여 있어요. 스타트 두 손으로 잡은 다음에 1번부터 순서대로 손을 교차하며 잡으면 돼요. 발은 자유예요. 난이도는 5.8이 제일 쉽고, 5.9, 5.10a, 10b, 10c 이렇게 어려워져요. 5.8 한번 해보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여화 남자가 벽에 올랐다. 다음 홀드를 찾지 못할 때 “바로 아래 5번이요! 왼쪽에 노란 홀드가 6번이요!”하고 알려줬다. 중간쯤 갔을까, 대여화 남자는 주춤거리더니 내려왔다.
“제가 힘이 다 떨어져서요. 그런데 10b면 엄청 잘하시네요. 한지 얼마나 되셨어요?”
아, 그 질문이 나오고야 말았다. 조금 망설이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1년이요.”
“우와.”
대여화 남자가 고개를 뒤로 돌려 안경 낀 남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2개월 반이요.”
안경의 대답을 듣고 내 입에서 “우와” 소리가 나왔다. 그러니까 1년 한 사람과 2개월 반 한 사람이 같은 문제에 도전하고 있는 거였다.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쪼그라드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아까 이렇게 대답했어야 하는데.
“시작한 건 1년 됐는데요, 중간에 한두 달 쉬었고요, 바쁠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 했어요.”
구구절절 내 실력을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와 안경을 번갈아 보던 대여화 남자가 중얼거렸다.
“저도 잘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남자분들은 키도 크고 힘도 좋아서 금방 잘하시더라고요. 지구력 꾸준히 하면 실력 빨리 늘어요.”
어쩌면 대여화를 신은 남자와 두세 달 후에 같은 문제를 풀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독히도 느린 사람이니까.
암장을 나오기 전에 센터장님에게 물었다.
“저 발이 미끄러져서 살짝 바닥에 닿였는데 그래도 끝까지 갔어요. 10b 완등했다고 인정되나요?”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문제를 풀었다고 억지 부리고 싶었던 것 같다.
인정 안 됩니다,라고 속시원히 대답해 주면 좋았을 텐데. 센터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자기 양심에 달린 거…….”
나는 그 순간 양심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떨어진 음식도 3초 안에 주워 먹으면 괜찮다는 게 국룰인데. 클라이밍에서 바닥 0.5초 디딘 건 괜찮다는 룰은 없나. 바로 다음 동작 넘어가서 끝까지 완등했는데.
하지만 내가 두 번이나 발이 미끄러지고 그렇게 짜증이 났던 건 깔끔하게 완등하고 싶은 마음 때문 아니었을까. 나를 속이고 싶은 마음과 속지 않으려는 마음이 싸웠다. 누가 이겼냐고?
그래도 나, 10b를 완등할 정도의 지구력은 되는구나.
발에 더 집중하고 코어에 힘을 빡 줘야겠다.
사람들은 이런 걸 정신 승리라고 부르는 것 같다.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발이 미끄러지던 순간이 천장에서 무한 반복되었다. 문득 지구력 10b는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궁금했다. 인터넷 창을 열어 '10b 난이도'라고 입력했다.
‘10b 하는 초보인데…’라는 제목이 보였다. 아, 초보구나. 그래, 초보지.
‘볼더링으로 치면 무지개 난이도에서 초록에서 쉬운 파랑 정도’라는 댓글이 있었다. 그거밖에 안 된다고? 나 무지개 난이도에서 보라는 하는데.
‘지구력과 볼더링은 다른 거 같아요.’ 지구력을 못해도 볼더링은 훨씬 잘한다는 댓글을 봤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네. 잠시 안도했다.
공부에 비유하자면, 나는 매일 영어 공부하는데 성적이 안 나오는 학생이랄까. 영어 단어도 외우고 문제집도 풀고 매일 세 시간씩 영어 공부했는데 겨우 60점 받는 학생. 시험이 어려웠냐 하면 그건 또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은 80점, 90점을 거뜬히 넘는다. 그 옆에서 속상함을 내색하지 못하고 혼자 속앓이 하는 학생이 나다.
그래도 나는 왜 포기하지 않을까. 안 될 것 같은데 왜 계속할까. 너무 느려서 실력이 늘고 있는 게 맞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왜 멈추지 않을까.
힘도 없고, 순발력도 없고, 유연성도 없으며, 용기까지 없다. 손 한번 뻗어보지 못하고 그냥 내려오는 일이 부지기수인 나는, 이렇게 열등생인 나는 왜 계속 클라이밍을 할까.
글을 쓰며 그 답을 찾아보려 한다. 형편없는 몸치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아등바등 애쓰는 열등생의 클라이밍 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