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양>은 1997년에 나온 2집 타이틀인데, H.O.T.의 대표곡 라인에서는 살짝 빠져있는, 대중적인 인기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던 노래다. 나도 그동안 이 곡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없었는데 최근 아주 오랜만에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멋있는 노래였나?
일단 스타일링이 매우 세련되었다. 헤어야 세월의 흐름을 어쩔 수 없다 쳐도 무채색 수트나 액세서리는 지금 아이돌이 걸치고 나와도 찬양받을 만한 디자인이다. 힙합 기반의 비트에 맞춘 안무에서도 멋이 줄줄 흐른다. 댄스 브레이크의 안무는 일명 태권도 춤이라고 해서 잠깐이나마 유행했던 기억이 난다.
컨셉을 소화하는 멤버들의 능력도 출중한데, 그 중에서도 문희준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그가 저렇게 뛰어난 멤버인 줄 당시에는 실감하지 못한 것이 놀랍다. 아마 너무 어려서 그렇게까지 깊이 있게 감상할 깜냥이 안 되었을 것이다.
<늑대와 양> 무대에서 문희준이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다른 멤버들의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비중이 많은 멤버 중 장우혁은 강렬하긴 한데 샤우팅 랩하고 안무 이끄느라고 좀 여유가 없어 보이고, 강타는 컨셉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무섭게 보인다.
그런데 문희준의 무대 매너는 모든 면에서 균형이 맞아, 경직되지 않은 자유분방함과 무게감이 공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SMP 특유의 '기괴함' 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는 데서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 분명 이상하긴 한데 모양 빠지는 것이 아니라 '멋있게 이상한 컨셉' 을 너무나 잘 표현한다.
그러고 보면 H.O.T. 멤버들 중 에이스는 역시 문희준이었다. 가수로서, 혹은 작곡가로서의 실력은 강타가 가장 뛰어났지만 '아이돌' 로서의 자질은 문희준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아이돌이 지녀야 할 능력치 중 모든 부문이 평균 이상이었다. 춤이야 팀에서 1, 2등을 다투고, 노래도 꽤 하며, 외모도 적당히 잘생겼고, 앞서 강조했듯 컨셉 소화력이 훌륭한데다 예능감까지 탑이었다.
저 시절엔 아이돌에 센터라는 개념이 희박했을 때지만, 만약에 그런 포지션이 있었다면 HOT의 센터는 단연 문희준이 맡았을 것이다. 단순히 예쁘고 잘생기면 되는 게 아니라 탁월한 춤솜씨와 능숙한 표정 연기, 좌중을 사로잡는 자신감, 풍부한 표현력이 필요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4집 타이틀 <아이야>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아이야>는 전형적인 SMP이자 해당 장르의 시초로, (<열맞춰>가 먼저 나왔다는 건 알지만 아이야 쪽이 더 잘 만든 노래라고 생각한다) 당시 H.O.T.가 최절정의 인기를 누릴 때 나온 곡이다.
아이야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워낙 좋아하던 노래라서 아직도 음원으로 종종 듣긴 하지만 무대 영상을 돌려본 적은 거의 없었다. 90년대 음악방송을 열심히 시청한 만큼 무대 자체에서는 더 이상 새롭게 느낄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영상을 한 번 보고 나니, 이 퍼포먼스에 대해 할 말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음원만 들었을 때와 무대를 함께 봤을 때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퍼포먼스를 볼 때는 이 노래 참 좋다고, 정말 잘 만든 SMP라고 생각했는데 음원만 들었을 때는 묘하게 심심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무대 영상을 보면 신기하게도 훨씬 더 좋게 들렸다. 곡의 성격에 들어맞는 매우 적절한 안무와 표정, 연기, 스타일링이 청각적 자극을 시각적 표상으로 변환하는 것 같았다. 음악을 비주얼로 표현하고자 한 SM의 지향점을 한 순간에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샘플링한다는 아이디어 역시 당시에도 참신하다고 느꼈었고 지금 들어도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 비장한 현악 선율에 더해진 일렉 기타 소리, 음악에 맞게 자잘한 움직임 대신 단순하지만 크고 파워풀한 동작으로 구성한 안무, 장우혁의 일갈 (For the one sweet nine!)이 터져나오자마자 고막을 때리는 강렬한 사운드, 역시 음악에 따라 격렬해지는 춤. 오프닝부터 인상적인 순간의 연속이다.
이 무대를 소화하는 멤버들의 표현력도 이미 어느 경지에 올라있다. 이상하고 기괴하고 기기묘묘한 요소들의 총집합인 음악을, 한마디로 말해 우리 엄마가 극혐하던 모든 것들을 연기하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다. 본인들이 곡의 메시지와 컨셉에 완전히 몰입해서, 관객들에게 오직 충격적인 모습만을 보여주고자 결심한 것 같다. 하나같이 묘하게 제정신이 아니어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즉 독보적으로 이상해보이는이는 역시 문희준이다. 보기만 해도 겁나는 가위손을 양손에 끼고 무대 한복판에서 아스트랄한 동작을 선보이는데, 그 어려운 연기를 기가 막히게 소화한다.
H.O.T.의 멤버 구성을 생각해보면 에스엠이 그에게 센터에 해당하는 역할을 맡긴 것이 이해가 된다. 장우혁은 팀에서 제일 야성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였고, 강타는 반대로 모범생스럽고 단정한 느낌, 토니는 댄디하고 부티나는 귀공자였으며 이재원은 형들의 강한 캐릭터성을 보조하고 받쳐주는 편이었다.
반면 문희준은 지나치게 날라리 같지도, 고지식해보이지도 않았고, 카리스마 넘치게 굴다가도 필요할 때는 언제든 장난기 있고 명랑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양극단의 개성을 지닌 멤버들 사이에서 균형과 중심을 잡아 H.O.T.라는 팀을 대표하는 단일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멤버였던 것이다. 그가 모든 음악의 컨셉을 찰떡같이 소화하는 동안 다른 멤버들은 저마다의 매력을 한층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이돌 리더에게 필수적인, 꾸미지 않아도 절로 묻어나는 '멋', 대놓고 말하자면 '간지'의 소유자였다.
덧붙여 말하자면, 에스엠 보이그룹의 팬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팀마다 한 명씩 맡는 괴상한 헤어스타일의 담당(?) 역시 문희준이다. 저 회사는 옛날부터 멀쩡하게 생긴 애들의 머리에 못할 짓을 하기로 악명이 높은데 그 피해자는 대부분 센터 멤버들이다. 아이야 무대의 스타일링을 보면 물론 대체로 다 정상에서 벗어난 헤어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비정상은 단연 문희준이다.
절규 파트를 담당하는 장우혁은 의외로 제일 멀쩡한 머리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너무 강렬한 파트를 맡다 보니 이미지를 좀 중화시킬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두 번째로 이상한 토니 안의 경우엔 워낙 곱상하게 생겨서 저런 머리를 해도 비주얼에 피해가 덜 갈 것이라고 판단해서 해준 게 아닐까 싶다. 문희준은 그냥 아이야라는 음악의 컨셉을 대변해야 하니까, 즉 충격적이어야 하니까 저런 머리를 준 거고.
아무튼 그렇게 H.O.T.는 SMP라는 장르를 대중에게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후배 보이그룹들은 무조건 한 번씩은 이 요상한 장르를 선보이게 되지만, 그 최초이자 최고는 아이야임을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