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남녀평등주의자라고 자부하며 사는 나이지만, 이런 나도 남편 앞에서 약자 포지션을 취하게 될 때가 있다.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곤충과에 속하는 생물들로, 살다보면 어느 집에서든 무조건 마주치게 되는 그들 때문에라도 내게 싱글라이프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라 생각하고 산다.
그 외에 내가 아주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분야가 있다면 연애에서의 주도권이랄까, 행동 순서(?) 같은 것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남편에게 무슨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누굴 길들이는 건 못하거니와, 그가 길들여질 사람도 아니다.
다만 친한 동생이나 친구, 나아가 미래의 장성한 딸래미가 그 문제를 내게 상담해 온다면 '무조건 고백은 남자가 먼저' 라는 케케묵은 명제를 고수할 작정이다. 갑질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래야만 내가 아끼는 그들(여자 쪽)의 연애가 평탄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내게 그런 믿음을 안긴 건 실제 경험도 아니고 주위 사례도 아닌, 20대 초반에 주구장창 읽어 댄 연애지침서들이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냐 묻는다면, 고수가 아니기에 실전이 아닌 이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하겠다.
그런데 옛날부터 들어오던 우리 언니들의 음악 중에서는 이런 내 꼰대스러움을 자극하는 가사가 있었으니, 2집에 실린 <Shy Boy>라는 곡이다. Dreams Come True가 타이틀이었던 앨범에서 무려 1번 트랙을 차지했던 음악이다.
언제나 네 편지가 오겠지만 나는 답장 쓰지 않겠어
맨날 그런 소극적인 방식도 맘에 안 들어
98년도라는 시대상을 감안해보자. 남녀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전통적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저 남자는 편지로 마음을 전하고 있다.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려는데, '언제나' 편지가 온다는 구절이 마음에 걸린다. 이미 서로 호감이 있는 걸 아는데도 지지부진하게 편지만 부쳐대는 게 틀림없다. 어쩌면 삐삐가 없었던 게 아닐까?
오늘도 같은 자릴 만들지만 너는 끝내 말을 하지 못해
더 이상 기다릴수 없을 때 널 차지하고 말 거야
차지하고 말 거라는 멘트까지 나왔다. 이 정도면 변죽을 너무 과하게 울린 거다. 백지영의 Dash라는 노래도 2년 후인 2000년에야 나왔다.
처음 만난 그때 그 순간부터 매일 같은 꿈에 행복했어
오직 너를 위해 아침을 준비할 난 너의 하나
하.. 아침을 준비한다니. 난 신혼 때 외에는 남편에게 아침밥을 해준 적이 없다. (물론 그가 아침을 먹기 싫어한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이렇게 현모양처를 꿈꾸던 여자를 누구보다 적극적인 현대 여성으로 만들어 버린 자, 대체 누구냐.
아직까지 말도 못한 네가 한심해
내일까진 너의 고백 기다리겠어
최후통첩이다. 한심하다는 단어까지 나왔으면 참을 만큼 참았단 소리다. 누군지 몰라도 이제 고백 좀 해라.
답답한 남주인공과 별개로 Shy Boy는 즐겨들을 수 밖에 없는 곡이다. 도입부의 독특한 리듬과 선명한 타악기의 사운드는 2집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열아홉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바다의 도도한 보컬. 어찌나 오만하고 쌀쌀맞은지,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하고 싶어진다. (언니, 그런 목소리로 말하면 겁나서 아무도 고백 못하겠어요.) 숨겨왔던 순종적 성격을 표출하는 파트는 유진과 슈가 아주 가녀리게 불러두었다.
시종일관 독특한 분위기로 흘러가다 등장하는 외계인 랩. Dreams Come True처럼 Shy Boy에도 그 이상한 파트가 있다. 아무래도 저 때 유영진이랑 이수만이 기계음스러운 랩에 꽂혔나 보다. 아직도 그 목소리가 유진과 슈의 육성 100프로인지, 아니라면 몇 퍼센트나 변조한 건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