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던 도시에서 새내기의 마음을 한껏 설레게 하는 이벤트가 벌어졌다. 리틀 야구대회 개최를 기념해 연고 구단인 한화 이글스에서 유명 선수들이 방문한 것이다. 주최 측을 달리하는 두 대회가 열렸는데 한 번은 박찬호가, 다른 한 번은 김태균과 류현진이 팬 사인회를 가졌다.
김과 류가 오던 날, TV에서만 보던 유명 선수들을 실제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냉큼 달려가 줄을 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았다. 뉴비라서 야구선수 사인을 어디다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A4 용지 크기의 스프링노트 하나만 덜렁덜렁 가지고 갔더니,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번듯한 야구공이나 배트, 심지어 유니폼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한껏 기가 죽었다.
야구공 대신 허접해 보이는 노트를 내밀면 선수들이 싫어하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공을 사서 다시 올까? 하지만 번듯한 야구공을 파는 곳이 근처에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 사이 저분들이 가 버리면 어떡해.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동안 줄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내 차례가 성큼 다가왔다. 여전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갈 위기였다. 불안해하는 동안 바로 앞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요 앞에 있는 기다란 사인용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나와 탁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거한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아, 나 진짜 어떡하지.
그런데 그때, 경기장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 두 사람이 나란히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기회였다. 그들의 시선이 저 멀리를 향한 틈을 타, 나는 탁자에 노트를 놓고 아주 조심스레 앞으로 밀었다.
류현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그것을 보았다. 그는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펜을 들더니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사인을 했다. 그가 노트를 봤을 때부터 사인을 완료할 때까지의 몇 초 동안 내 머릿속엔 온갖 걱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우려와 달리 그는 종이에 사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불쾌해하지 않았다. 옆의 김태균도 마찬가지였다. 멋진 물건을 들고 있는 팬들에게 사인해 줄 때와 똑같은 태도였다. 성공이었다. 그 순간의 긴장과 기쁨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15년이 지났음에도 두 선수의 슬로모션 같던 동작은 방금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상처럼 생생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사인받은 종이를 스프링에서 찢어낸 후, 지저분한 가장자리를 칼로 말끔하게 잘라냈다. 코팅지 사이에 놓고 기포가 생기지 않게 세심하게 덮어 눌렀다. 넓이가 남는 부분을 자르고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다. 여전히 공이나 유니폼에 비하면 초라해 보였지만, 내 인생 최초의 야구선수 사인인 만큼 오래도록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사회인이 된 어느 날,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야구가 화제로 떠올랐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서 한창 승승장구하던 시기였다. 아마도 14개의 선발승 중 한 개를 거두었을 때였을 것이다. 신나게 야구 이야기를 하던 중 문득 옛날에 받아둔 그 사인지가 떠올라 자랑을 했더니, 친구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에이, 그거 야구공에 받는 거 아니면 별로 의미 없잖아. 부럽지 않다.”
“뭔 소리야? 지금 류 사인받으려면 LA까지 가야 되는데?”
나는 지그시 웃으며 그들의 논쟁을 지켜봤다. 사인이 가치가 있고 없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새로운 스포츠의 매력에 빠졌을 때의 설렘 그 자체였다. 오래된 종이가 되살려주는 행복한 추억만으로 내겐 충분했다.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꺼내어 보니, 역시 코팅해 놓길 잘했다는 생각부터 든다. 아직도 새것 같다. 육필의 생동감도 느껴진다. 손놀림에 따라 펜이 그린 획의 굵기가 미세하게 변한 것이 보인다. 특히 저 No.99를 보니 그것을 휘갈겨 써 준 이가 정말로 TV에 나오는 그 선수, 우커송에서 완봉승을 거두고 한 팔을 번쩍 치켜들던 그 선수가 맞다는 실감이 난다. 그에게는 수천수만 번 써 준 숫자이겠지만 내게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훗날 저 번호는 이글스의 영구결번이 될 테지.
왕조 신민의 삶 즐기기
강자의 삶을 살아본 적 있는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약자도 되어보고, 강자도 되어보면서 인생을 보내기 마련이다. 압도적인 강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야구팀 덕분에 간접적으로나마 최강자의 삶을 체험해 보았다. 왕조 시절 삼성 라이온즈 얘기다.
2010년대 초반 내 낙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야구를 보는 것이었다. (아저씨 같지만 엄연히 스물대여섯 살 여성이었다...) 그걸로 낮 동안 직장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다 풀 수 있었다. 거의 맨날 이겼기 때문이다.
그땐 이 팀이 진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점수를 내고 막아서 이겼다. 어쩌다가 져도 기분도 안 나빴다. 하도 많이 이기니까 하루 정도 쉬어도 된달까? (당시에 타 팀 팬한테 이런 얘기를 했다면 맹비난받았을 것이다) 맛있는 거 먹으면서 경기 보다가 치우고 좀 놀다가, 나중에 다시 틀어보면 역시 이기고 있었다. 내가 이재용도 아닌데 왜 팀과 나를 동일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내가 승리자가 된 양 기분이 좋았다. 과몰입의 긍정적인 측면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그 시절 라이온즈는 KBO를 거의 씹어먹은 수준이었다. 내 기억으로 승률이 거의 7할 가까이 된 적도 있었다. 이 많은 경기를 6개월에 걸쳐 치르는데도 저 정도의 확률이라면 가히 탈 리그 급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참, 그 팀의 특징이 또 있었으니 여름만 되면 귀신같이 성적이 오른다는 것이었다. 팬들이 장난 반 농담 반으로 내세운, 대구 팀이라서 더위에 강하다는 이론이 과학적으로 보일 만큼 신기한 현상이었다.
그렇게 라이온즈 왕조는 무려 4년이나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나는 백성 1인으로 더없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려 왕조의 창업공신들이 그 평화를 산산조각내고야 말았다. 소식을 접한 날,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팀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왕조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역사책을 보면 내적 요인으로 나라가 망한 케이스들이 종종 보이는데, 그때의 라이온즈가 꼭 그 짝이었다. 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그 후로 한동안 내 입에서는 수시로 초성 ‘ㅇㅇㄱ’가 흘러나왔다. 아이고라든가, 으이그라든가..
결국 야구 시청을 그만두었다. 나도 반쪽짜리 신민이었다. 성적에 따라 마음이 바뀔 정도의 알량한 충성심으로 팬 코스프레를 했을 뿐이다. 깔끔하게 인정하니 마음이 편했다.
다만 백성으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하나의 양심은 있었으니, 팀을 갈아타지는 못했다. 삼성 왕조가 몰락한 이후 다양한 팀이 왕좌를 차지했으나 어디도 응원하고 싶지 않았다. 다들 얄미웠다. 모두 우리 자리를 빼앗은 장본인 같아 팔짱을 끼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다시 야구와 담을 쌓고 지내온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요즘엔 예능 보는 재미로 가끔 <최강야구>를 보고 있다. 웃기고 재미있어서 좋지만 화려함이나 긴장감은 덜하다. 프로야구만의 매력이 그립기도 하다.
아직은 팬으로의 복귀는 어렵고, 아이가 자기 방에서 생활할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래서 거실 TV에 계속 야구를 틀어놓아도 무방한 때가 와야 다시 본격적인 시청과 응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땐 왕조가 아니더라도 섭섭해하지 않을 것이다. 재미있는 게임이자 스포츠인 야구 경기를 다시 감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울 것 같다.
돌이켜보면 지난 2008년 야구팬이 된 일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잘된 일이다.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하나 더 생겼으니까 말이다. 혹시 아직도 이 복잡 정교한 스포츠의 초기 장벽에 막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용감하게 그것을 깨고 도전해 보길 권한다. 왜 다들 야구, 야구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