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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Jul 15. 2024

이별에 겹친 이별과 슬픔에 더한 슬픔 - 1

나의 베스트 박정현

박정현의 노래를 접한 건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인생의 어느 한 구간이었다. 하필 가을이었다. 나뭇잎 굴러가는 모습에도 얼굴이 아렸다. 기숙사 방의 창으로 바람이 밀려오면 스산함에 몸을 떨었다. 룸메이트들이 모두 잠든 새벽, 복도로 나가 바깥을 내다보며 풀냄새를 맡으려 해도 적막한 어둠은 선선한 공기에 쓸쓸함만을 입혀 놓았다. 나는 이렇게 서글프려고 먼 곳으로 온 걸까. 희미하게 깜빡이는 옆 동의 불빛을 바라보며 멍하니 자문하곤 했다.

     

무엇이 날 그토록 슬프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아도 마땅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세상의 모든 일이,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처량했다.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을 때면, 좁은 방보다 더 좁은 책상에 앉아서 음악을 들었다. 나무로 된 책상은 군데군데 찍히고 벗겨져 희끗희끗했다. 꼭 사람이 나이 든 모습 같았다. 그래도 그 편이 음악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고난을 버텨온 모양이, 고통의 한복판에서 몸부림치는 가사 속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감정적인 시기에는 감정이 더 필요했다. 나는 슬프지 않으려고 들은 것이 아니라 더 슬퍼지기 위해 들었다. 박정현의 이별 노래는 그 일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헤어짐보다 괴로운 헤어짐, 그리움보다 가혹한 그리움, 애절함보다 짙은 애절함이 녹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거의 즐겼던 것 같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 속에서 이별보다 극심한 이별을 겪어보고 싶었다.

     

박정현은 결코 같은 선율을 똑같이 부르지 않았다. 1절보다 2절이, 2절보다는 3절이 더 진했다. 그녀가 목소리에 싣는 비감은 미감으로 가슴에 꽂혔다. 그 감동에 힘입어 나는 버거움이 씻겨 나간 후 한결 잔잔해진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알앤비 보컬리스트로 유명한 박정현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의 심금을 울리는 곡들은 한국적인 정서가 가미된 발라드곡들이다. 물론 훨씬 통속적이고 가요적이었던 그 시절 다른 노래들에 비하면 몇 배는 세련되었음이 틀림없.

     

박정현의 보컬에 대해 불호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과한 기교와 애드리브가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라이브보다 음원이 더 좋다고 느끼는 순간은 대부분 노래에 심취한 나머지 지나친 애드리브를 선보일 때다. 그러나 그 화려함에 가려진 감성을 확인해 버린 후엔 그런 도취쯤이야 얼마든지 눈 감아버리게 된다. 윤종신과 정석원의 가사를 그토록 드라마틱하게 구현할 수 있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내가 사랑한 박정현의 곡들은 대부분 저 두 탁월한 뮤지션의 손길이 닿은 결과물이고 그만큼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노래들이다. 신선함을 보장할 수 없는 이 리스트를 그래도 독자들 앞에 내놓는 이유는 오로지, 공개적으로 감탄하지 않고는 못 참겠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 (작사 윤종신, 작곡 윤종신)

     

기억하나요, 이별한 날

냉정했던 내 어설픈 모습을

그렇지만 난 내내 그리워만 하다

이젠 그대를 매일 찾아가는 걸

     

조금 더 가까이 보고 싶어

그대의 따뜻한 두 눈을 바라볼 수 있게

언젠가 내가 지쳐버리면

남는 건 기억 속의 그대뿐

     

내겐 잊는 것보다 그댈 간직하는 게

조금 더 쉬울 것 같아요


많이 쉬운 게 아니라 조금 더 쉽다는 말이 어쩜 이토록 아프게 들릴까. 마지막 순간이 가장 어설펐다는 사실은 왜 그리 잘 알고 있는 걸까.



오랜만에 (작사 윤종신, 작곡 이현정)

     

우연히 그대 내 소식 듣고

너무 반가웠다구요

하지만 내게 그대 소식은

며칠 밤을 헤매게 하죠

     

나 이제 그대에게는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가요, 추억인가요

그대에겐 너무 쉬운 걸

     

나 이제 그댈 보아요

마냥 웃고만 있는 모습을

어떤 아픔도 견딜 수 있는

모진 그대를 배울 수 있게


친구인지 추억인지 묻는 대목이 참 절묘하면서도 슬퍼서, 먹먹한 감정을 누를 길이 없다. 어느 쪽이든 더 이상 사랑이 될 수 없는 처지를 인정해 버린 처연한 모습에 가슴이 저민다. 차라리 상대처럼 모질어서 진작에 끊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까만 일기장 (작사 윤종신 작곡 나원주)

     

믿었던 다짐은 흐려져만 가고

다신 부르지 말자 했던 사람만 떠올라

     

소리쳐 봐요 가슴 깊은 그곳에 숨겨왔던

한없이 보고 싶다는

나의 그리움

왜 그대의 생각은

지치지 않는지, 이젠 제발 안녕

     

어디 있나요 그저 어디쯤인지 알 수 있다면

그곳을 향해 소리쳐

말해주겠어

그래, 아직 사랑해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안녕해요


잠들지 못하는 밤, 피로는 더해가는데 사랑했던 이의 기억만은 지치지도 않고 밀려든다. 아직도 날 생각하지? 날 그리워하지? 하며 다그치는 것 같다. 그래 맞다고, 아직도 사랑하고 아직도 잊지 못했다고 속마음을 다 끄집어내어 보여줄 테니, 제발 이젠 안심하고 가 주었으면.



미장원에서 (작사 정석원 작곡 정석원)

     

나 이제 머릴 자르며

새로운 삶을 준비하지만

주위의 친구들에겐

유행에 맞춘

내 새 모습 어떠냐며 자랑해야

하겠죠

     

나 이제 머릴 자르며

그 두 번째를 준비하지만

한 번만 눈을 감으면

두 눈에 고인

눈물 흘러내릴 텐데 어떡해야

하나요

     

이런 게 자유라면

차라리 구속받고 싶은데

늦었죠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죠

추억만은 부자라며 위로하며

살게요


이토록 처절한 가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이별을 했을까. 애써 홀가분한 척하려는 노력을 새 헤어스타일을 자랑한다는 단순한 행동으로 전부 설명해 버리는 솜씨는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하겠죠’가 ‘하나요’가 되고 ‘살게요’가 될 때까지, 그녀는 남몰래 아픔을 묻었다가 다시 파내어 품에 안았다가, 되묻었다가를 거듭했을 것이다.


- 두 번째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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