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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씩씩 Apr 18. 2024

단단한 불혹

불혹을 단단하게 만드는 유연함에 관하여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다고도 볼 수도 없는 나이. 사고가 단단해져서 흔들림이 없는 나이, 오죽하면 불혹이라 칭했을까 싶은 나이. 바뀐 나이로는 30대 후반을 붙들고 있긴 하지만, 기존의 셈대로 치자면 나는 올해 불혹이 되었다. 타인과, 특히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과 대화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꼰대’ 같은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해서,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지 않으면 한순간에 꼰대가 되기 십상인 나이가 됐다. 내 안에 자리 잡힌 생각이 너무도 단단해서 ‘나도 이제 영락없는 꼰대가 됐구나’ 하고 체념할 뻔했는데, 단념하기엔 일렀다. 흐름에 따라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고의 유연함이, 내게도 아직 남아 있었다.


  최근 장거리 운전 중,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연예인 이야기까지 등장하게 됐다.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엄청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에 대해 칭찬을 하다가, 남편을 통해 그 배우가 100억이 넘는 건물을 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한 개인이 그렇게 많은 돈을 가져도 되는 걸까?”

  “자본주의 사회니까 어쩔 수 없지 뭐”

  나의 진지한 물음에 남편은 가볍게 응수했다.

  “그래도 그건 좀 너무 한 거 아닌가? 회당 출연료 상한가라도 낮춰야 하는 거 아냐?”

  “아니 네가 어쩌다가 사회주의자가 됐어? 사상 검증 들어가야겠는데?”

  한때 학생 운동을 하며 빨갱이로 이름을 날렸던 남편한테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들으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이렇게 됐겠어 오빠랑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된 거겠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퉁명스레 쏘아붙였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비단 남편 때문인 것만은 아닌 듯했다.


  한편, 지난달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이가 바지를 입다가 발이 걸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콩콩 뛰면서 ‘아니 이게 뭐야 장애인도 아니고’라고 말을 하는데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훅 치고 올라왔다.

  “너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어? 그게 장난으로 할 소리야? 처음부터 장애인이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이 있는 줄 알아?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어느 날 갑자기 장애인 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절대 놀리면 안 돼. 장난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알겠어?“

  숨도 안 쉬고 정신없이 쏘아붙였다. 사실 그 순간 아이의 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나를 더 크게 놀라게 한 건 그 말 한마디에 폭발해 버린 내 인권 감수성이다. 아니 내가 이렇게까지 인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남편을 알고 지낸 10년의 세월 동안 남편을 빨갱이라고 놀리던 내가 ’사회주의자‘ 소리를 듣게 된 것도, 느닷없이 ’인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된 것도, 최근 읽은 책과 관련이 있었다. 독서량이 증가하며 평소에 즐겨 읽던 장르 외에 다양한 분야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책을 통해 얻게 된 생각들이 자연스레 내 삶에 스며든 것 같다. 100억이 넘는 건물을 샀다는 배우의 이야기를 들으니 삼각김밥 2+1 행사를 기다리며 3,000원으로 일주일을 버텼다던 젊은 작가의 이야기가 떠올랐으며, 아무 생각 없이 장애인을 희화화하는 아이를 보니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릿저릿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던 장애인 작가의 삶이 떠올랐다.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분명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고, 내가 변해가는 모습이 나아가고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드니 자꾸만 읽는 일에 욕심을 내게 된다. 나는 책을 통해 내가 겪어보지 못 한 분야, 내가 알지 못 하는 생활의 이야기를 그 어떤 각색도 없이 만날 수 있다는 게 기쁘다. 작가의 손끝에서 뻗어 나오는 온전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도 높은 즐거움, 그것이 자꾸만 읽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 낸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 말에 담긴 우려가 무슨 뜻인지 너무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쓰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우리 사회의 더 많은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 단순히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이들의 글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나는 충실한 독자로서 그들이 우리 사회에 건네는 ’메세지‘를 올바르게 읽어내고, 그것의 곧은 방향을 따라 나아가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쓰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거다. 여기에 작은 바람을 하나 보태자면 (나의 읽는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이왕이면 ‘잘’ 쓰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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