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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씩씩 Apr 25. 2024

최초의 기억, 그것은 사랑

사랑으로 만들어진 사랑

  요즘은 미취학 아동이 혼자 집을 지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는 가능한 일이었다.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유치원에서는 잘 놀다가 하원 버스를 탈 때면, 집에 가면 혼자 있어야 한다고 집에 가기 싫어서 운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엄마 입장에서는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눈물 나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매일 혼자 가난 속에 앉아 집을 지켰다.


  당시 문구점에는 인형과 인형의 옷, 장신구 등이 알록달록하게 인쇄된 4절 사이즈의 도화지를 팔았는데, 그게 1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00원이 생기면 문구점에 가서 종이 인형을 샀다. 며칠을 오려야 한 장을 끝낼 수 있는 가성비 최고의 놀잇감이었다. 매일 가위질만 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느 날 엄마가 전집을 한 세트 사주었다. 분명 우리 엄마는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 줄 여력이 없었을 텐데, 대체 나는 어떻게 책을 읽었던 것인지 궁금하던 차에 언젠가 엄마가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은애는 한글을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책 사 줬더니 혼자 읽으면서 알아서 한글 뗐잖아.” 그 당시 어린 나의 외로움은 의도한 적 없는 자랑으로 자라났다.


  그래서인지 읽는 일과 관련된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면 ‘몬테소리 어린이집 꼬맹이 위인방’이라는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이제 와서, 되짚어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책을 펴놓고 이야기 테이프를 닳고 닳도록 들었고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한글 학습이 이루어진 것 같다. 얼마나 열심히 보고 들었으면…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내가 무척이나 가엾고 짠한 마음이 들지만 당시에는 정말 재미있었다. 재미있어서 듣고 또 듣고, 읽고 또 읽었다. 열심히 읽었더니 엄마가 책을 또 사주었다. 엄마가 사 준 전집들이 책장을 가득 메웠다. 어느 날엔 위인전을, 또 어느 날엔 전래 동화를, 또 어느 날엔 창작 동화를, 돌려가며 신나게 읽었다. 내 책장은 다양한 책들로 꾸려져 있었고 당시의 나는 재미있는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서 마냥 좋기만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내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 보니 그때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엄마의 사랑이 새롭게 와닿았다. 연령마다 읽어햐 하는 전집 같은 게 정해진 것만 같은 육아 트렌드 속에서 내 아이만 흐름을 놓치게 둘 수 없다는 조바심에 좋다는 전집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출판사와 내가 아는 출판사, 그중에서 제일 먼저 제외된 것은 내게 가장 친근한 출판사였다. 프뢰벨과 몬테소리는 어린 시절 나의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이었지만, 내 아이의 책장에는 들여줄 수 없는 책이었다. 명불허전이라고, 여전히 좋다는 평이 우세했지만 가격 역시 압도적으로 우세한 탓에 가용 범위 밖에 있어 가장 먼저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 당시에도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책들이 있었을 텐데, 그 시절 우리 엄마의 생활은 나의 생활보다 훨씬 더 곤궁한 것이었을 텐데, 고마운 마음이 먹먹하게 차올랐다. 당시 엄마의 선택, 그에 따른 희생 덕분에 비싸고 좋은 책을 양껏 읽었던 나는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신나게 읽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어린 날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엄마가 사 주었던 책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곁에서 좋은 친구로 머물며 내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나의 책 사랑은 엄마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사실이 새삼 고마워서, 자꾸만 왈칵 뜨거운 것이 차오른다.


  나보다 더 젊고, 더 가난했고, 더 외로웠고, 더 많이 힘들었을, 지난날의 우리 엄마를 꼭 안아주고 싶다. 고생 많았다고, 그리고 정말 많이 고마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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