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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Jun 09. 2024

다시 보니 이 영화의 끝은 새드 엔딩이 아니었어 (1)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이누도 잇신 감독

 2004년에 개봉한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지금도 영화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포스터에 실린 그 유명한 사진, 남자 주인공 츠네오가 여자 주인공 조제를 등에 업고 바닷가를 거니는 장면으로 기억되는 이 영화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뜨거운 연애를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작품을 봤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장애라는 장벽을 극복한 사랑, 그리고 가슴 아프게 이별한 영화로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다시 보니 이 영화는 내 기억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미리 언급하자면,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가득 담겨있다. 혹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이 잘 안 나는 장면도 몇 군데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영화를 본 다음에 이 글을 읽어도 좋고, 이 글을 읽은 다음에 영화를 봐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넷플릭스에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뿐 아니라 한국판 리메이크 버전인 <조제>도 올라와 있다. 그리고 어떤 리뷰보다도 긴 분량의 글이 될 텐데, 그 점도 양해 바란다.

  브런치에는 총 두 편에 나눠 글을 올릴 예정이다.          



 츠네오는 마작 도박장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다. 잘생긴 외모로 인기도 많고, 자유로운 연애주의자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다 인적이 드문 시간에만 산책을 하는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녀의 유모차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어느 날 새벽 유모차 하나가 언덕길 밑으로 굴러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소문의 유모차 안에는 젊은 여자애가 타고 있었고,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는 그녀가 여자 주인공 조제다. 이 일을 계기로 츠네오는 아침밥을 얻어먹게 되면서 조제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건 아무래도 조제라는 캐릭터일 것이다. 그녀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이다. 그녀는 유모차를 타고 산책을 나갈 때는 호신용 부엌칼을 들고 다니고, 집에서는 벽장 안에 전등과 이불을 두고 작은 방처럼 쓰고 있다. 다양한 책을 읽어서 아는 것이 많고 (영화의 배경이 아직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취약했던 21세기 초반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할머니와 사는 탓에 말투가 노인네 같다. 

 이 독특한 조제의 캐릭터에는 사실 많은 사회적 함의가 담겨있다. 바로 세상과 단절되고 고립된 장애인의 모습이다.


 젊은 여성이 장애를 갖는다는 건 많은 성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할머니는 조제와 산책을 나갈 때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이른 새벽 시간에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담요로 덮어둔다. 그리고 호신용으로 부엌칼을 들게 한다. 


 조제의 보호인처럼 보이는 이 할머니는 다른 한편으로는 조제를 좁은 세상 안에 가둬두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집약해 놓은 인물이기도 한다.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코와레몽(こわれもん)’이라는 표현이다. 할머니가 조제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다. 넷플릭스에서는 ‘불편한 몸’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실은 ‘망가진 것’이라는 뜻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하자 있는 물건처럼 바라보던 차별적 시선을 담고 있다. 그녀는 조제가 처음으로 츠네오와 산책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도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며 더 이상의 만남을 금지하기도 한다. 


 조제가 집 안 벽장을 자신의 방처럼 쓰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낭만적인 설정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외부 사람이 집에 찾아왔을 때 조제는 자연스럽게 벽장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늘 그래왔다는 듯이. 이것은 장애를 가진 가족구성원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던 과거의 악습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실제로 한국에서도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장애가 있는 아이를 벽장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던 시대가 있었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집에서 조제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보이지 않게 ‘치워지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는 뜻이다. 


 조제가 접하고 배우는 것들은 모두 책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많은 인물로 그려지지만, 사실 이 책은 버려진 것들이다. 새 책이나 도서관에서 빌린 것이 아니라 할머니가 폐지로 주워 온 것으로, 버려진 물건을 통해서만 세상을 접하는 조제란 인물은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의 (어쩌면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르는) 장애인의 어려운 환경을 담고 있다. 세상의 눈으로부터 감추는 존재이다 보니 제대로 된 교육이나 사회적인 교류의 기회가 없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장애인들이 처한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그것을 너무 전면에 내세우거나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배경에 두고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개인적으로는 이 톤 조절이 영화의 성공을 이끌었던 중요 포인트라고 본다. (한국판으로 리메이크된 <조제>를 떠올려 보면 이 톤 조절은 더더욱 중요해진다.)



 이런 여성 캐릭터가 장애를 갖지 않은 남성과 연애를 하게 된다면 그 이야기는 우리가 흔하게 접해온 동화 속 판타지를 따라가기 쉽다. 성안에 갇힌 공주와 그녀를 세상 밖으로 꺼내어 구원하는 왕자의 이야기. 실제로 영화는 그런 흐름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츠네오가 유모차에 스케이트보드를 연결하여 조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조제는 처음으로 빠르게 달린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두 다리가 불편한 그녀로서는 접하기 힘든 경험이다. 그리고 그녀는 츠네오와 산책 중에 담요를 쓰지 않고 세상을 바라본다. 유모차가 언덕 밑으로 떨어져 튀어 나갔을 때 조제가 했던 말은 ‘죽일 셈이냐?’ 다음에 ‘뭐야, 저 구름도 집에 가져가고 싶어’다. 하늘에 흔하게 널려있는 구름조차 마음껏 보지 못했던 조제는 그제야 세상을 구경하며 마음에 드는 것들을 그렇게 하나하나 주워 담는다. 성인이 되기까지 보호 혹은 숨겨야 하는 존재라는 이유로 세상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조제의 심경이 담겨있다. 츠네오는 그런 조제를 세상으로 끄집어내는 인물처럼 보인다.      

츠네오가 조제와 산책을 하던 장면

 할머니의 죽음 이후 츠네오가 조제를 찾아가는 장면은 성안의 공주를 구해주는 왕자의 이야기 구조가 더욱 심화하는 장면이다. 유모차 추락 사건 이후 조제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츠네오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조제에게 달려간다. 몸이 불편한 조제는 혼자서 어렵게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복지과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그렇다고 모든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집안의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이웃집 변태남에게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 하는 일도 한다. 츠네오는 그런 조제를 그냥 둘 수 없고, 자신을 돌려보내려다 다시 붙잡는 조제의 손에 이끌려 둘은 연인 관계가 된다.      

 아마도 이 장면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홀로 남겨진 장애인의 어려운 상황 때문에 관계가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혼자 남겨진 조제를 그냥 둘 수 없는 츠네오의 모습이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나 연민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런 질문들에 정면 돌파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츠네오와 썸을 타던 대학 퀸카(이런 식으로 밖에 요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카나에가 조제를 찾아와 대면하는 장면이다. 카나에는 조제를 혼자 둘 수 없어하는 츠네오 이야기를 하면서 대놓고 말한다. ‘네가 가진 무기가 부럽다’고. 이에 조제는 아주 잔인한 답변을 내놓는데, 바로 ‘그러면 너도 다리를 자르든가.’이다. 츠네오 같은 잘생기고 인기 많은 남자애를 사귀게 되었다고 조제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조제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아주 냉정하게 말해준다. 이는 조제라는 인물이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츠네오의 감정이 사랑이 아닌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었느냐는 질문에는 츠네오가 어떤 인물인지를 먼저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인기가 많은 남자다. 섹스와 연애에 관대하다. 자신의 섹스 파트너와 섹스를 하는 와중에도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 이야기를 하고, 대학의 인기 많은 여자애와 썸을 탄다. 나중에 조제와 이별할 때는 그녀로 환승 연애를 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점 때문에 츠네오라는 인물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거나, 남자주인공을 나쁜 인물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실은 내가 그랬다.) 


 그런데 영화의 이런 설정은 츠네오라는 인물이, 장애인과 연애를 하는 비장애인의 선택이 도리어 진심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츠네오는 조제가 아니더라도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이 많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꾸 조제에게 신경이 쓰인다. 조제와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잘 잊고 지내다가도, 조제를 기억나게 한 대학 후배를 보았을 때는 평상시와 다르게 짜증과 분노를 폭발한다. 츠네오가 조제를 다시 찾아가는 장면도 실은 취업 면접을 하던 자리였다. 자신의 취업이 걸린 자리에서 츠네오는 조제가 걱정이 되어서 모든 걸 팽개치고 달려간 것이다. 


 나이를 먹고, 여러 번의 연애 경험을 거치면서, 세상에는 사람들이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비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모든 사람이 심장이 떨려서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두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지 않으며, 이성적인 끌림이 아니더라도 참 많은 이유로, 참 많은 선택들을 한다. 


 그러니까, 거기에 동정이 섞여 있건, 혹은 연민이 감정이 숨어있건, 내 심장이 자꾸 그 사람을 찾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 사람에게 달려가고 싶게 하는 떨림을 느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런 상대와 연애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나이를 먹을수록 심장이 떨리는 상대가 내 인생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과 서로 마음이 끌려 연애할 수 있었다는 것은 더더욱 엄청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은 그런 기회조차 잘 주어지지 않으니까. 


 그런데 츠네오는 그런 사람을 만나 연애를 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조제였다. 옆집의 변태 아저씨처럼 여자의 가슴을 한 번 만져보고 싶어서도 아니고, 섹스가 너무 하고 싶어서 기회가 닿는 아무나 찾았던 것도 아니다. 다른 많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조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떨림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영화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츠네오란 인물을 이렇게  설정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조제는 어떨까?   (다음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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