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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Jul 12. 2024

소설가의 여행기에 빠진 것

<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김영하 작가가 쓴 여행 에세이다. 소설가가 본업인 그가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낯설지 않다. 그를 대중 앞에 더욱 유명하게 만든 <알쓸신잡> 시리즈에서 과거 여행의 이력들과 여행지에서의 이색적인 선택들이 노출된 적 있기 때문이다. 방송을 통해 드러난 김영하라는 사람의 여행 방식은 확실히 독특했다. 내 눈에 그는 정도를 향해 있으면서도 거기서 조금씩 어긋나는 예술가의 반골 기질 같은 것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적절한 삐딱함이 그를 대중의 품에서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가 실제로 했던 여행은 어땠을지 궁금했고, 시칠리아라고 하는 낯선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적은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기대와 호기심을 충족해 줄 것 같았다.      


 독자들이 책을 선택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때, 여행기에는 몇 가지 미덕이 필요하다. 우선 저자가 얼마나 넌더리 나는 일상에 지쳤는지를 공감되게 표현할 것. 직장과 집을 반복하는 대다수의 현대인은 누구나 가슴속에 사직서 몇 장쯤 품고 있다. 지긋지긋한 쳇바퀴를 끊어 버리고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살아온 시간에 비례해 커진다. 하지만 ‘생계’와 ‘다시 돌아올 곳’을 포기할 수 없기에 그 마음을 여행으로 대신한다. 여행기는 독자들의 이런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 필요한데, 그건 대체로 여행기 초반에 쓰인 저자의 고백에 좌지우지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성공적인 도입부를 선보인다. 한국에서 소설가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김영하 작가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는 극소수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현업, 자신에게 주어진 감사한 밥벌이에서 어떻게 지치고 도망치고 싶었는지 풀어놓는 책 초반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런 사람들(예술가 혹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공감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특히나 여행의 진짜 매력은 떠나고 난 뒤가 아니라, 떠나기 전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라면 더더욱. 이 고백에는 대학 강의를 맡았던 그가 어떤 자괴감과 괴리감을 느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는 내용도 나오는데, 여기서 김영하라는 사람에 대해 더욱 호감을 갖게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소설이 본업인 작가 김영하는 여행 에세이에 필요한 미덕을 잘 따르며 일상에 지쳐있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한다. 다만 타개책을 내놓는 과정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조금 생기기도 하는데, 그가 모든 일거리를 끊고 한 일은 캐나다 대학에 직접 이메일을 보내 일 년 동안 소설도 쓰고 한국문학 세미나도 할 테니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초청장을 받는다. 한국에서 성공한 극상위의 소설가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국 생활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집이 조금 일찍 팔려버린 것이다. 그 사이에 두 달 반이란 시간이 떠버렸고, 어떻게 할지를 아내와 고민하던 중 그는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여행지가 ‘어디’이냐이다. ‘어디’이냐를 통해 독자들이 여행이란 단어에서 꿈꾸는 낯섦과 낭만, 호기심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가 선택한 곳은 이탈리아, 시칠리아다. 어쩐지 김영하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탈리아라는 매혹적이지만 뻔한 나라에서, 시칠리아라는 뻔하지 않는 지역이라니. 그가 여행을 떠났던 시기가 2008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선택은 더욱 신선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에게 시칠리아는 아주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전에 이미 다큐멘터리 제작 때문에 방문한 적 있었던 것이다. 시칠리아를 선택한 이후부터 본격적인 여행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행은 일상을 낯설게 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도 새로운 언어, 새로운 문화, 새로운 환경에서 나의 일상이 지속된다는 점에서도,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나의 일상이 낯설게 바뀐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은 일상을 이어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성공적인 도입부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긴다. 가장 큰 단점은 여행기가 가져야 할 또 다른 미덕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인데, 바로 그 여행지를 독자에게 잘 소개하는 것이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시칠리아라는 섬에서 김영하라는 작가가 어디에 묵었고, 어떤 일상을 가져갔는지, 지극히 사적인 경험담을 풀어놓은 책이다. 하지만 자신이 여행한 시칠리아라는 공간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시칠리아가 어떤 곳인지, 이탈리아의 다른 곳과 뭐가 다른지 알지 못하고, 다음에 여행을 떠난다면 시칠리아로 가볼까,라는 마음을 독자에게서 끌어내지 못한다. 우리가 그의 여행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김영하라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인지, 그의 일상은 무엇을 중요시하는지와 같은 그에 대한 사적인 정보들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김영하 작가의 팬이라면 이 책은 다른 면에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단점은 이 여행기에 로마와 그리스에 관한 지식이 지나치게 많이 서술된다는 점이다. 이 지식이 김영하의 여행과 잘 맞물려 돌아간다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어떤 대목에서는 조금 뜬금없게 등장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마도 여행기에 익숙하지 않은 소설가의 타개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정보도 좋지만, 그보다는 앞서 지적했던 시칠리아라는 공간을 그려낼 수 있는 정보가 적혔다면, 그 정보와 그가 겪어보고 느꼈던 시칠리아의 모습을 잘 조합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이제는 흔한 이야기가 된 이탈리아의 끔찍한 철도 시스템과 관련한 에피소드 외에도, 독자들이 시칠리아와 연상할 수 있는 장면들이 풍성해졌을 것이다. 


 이 책은 김영하 작가(정확히는 부부)의 2008년 여행기를 담았다. 그런데 책이 발간된 시점은 2020년이다. 이 12년의 시간 차이 때문인지 그는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12년이란 시차는 제목뿐 아니라 책의 내용에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책에 삽입된 사진의 화질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사진의 아쉬움은 저자의 본업을 생각할 때 양해할 만하다.) 한국을 벗어나면 다른 나라들은 IT 인프라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곤 하는데, 이탈리아는 유독 그런 나라인 것 같다. 그래서 김영하의 여행기를 읽다 보면 2008년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전, 아직 인터넷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 같다. 이 책에는 그런 묘한 시차가 등장한다. 그 시간을 거슬러 김영하라는 사람의 여행 스타일이 궁금하다면, 한국의 성공한 소설가는 어떤 식으로 ‘긴 여행을 살아가는지’가 궁금하다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어쩌면 ‘알쓸신잡’ 같은 방송에서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김영하 여행의 디테일한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에는 김영하 작가의 생존 요리법, 지브리와 이탈리아의 연결고리,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여행하기 가장 안전한 시대라는 통찰처럼 흥미로운 내용들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시칠리아를 알고 싶다거나, 다음 여행지를 참고하기 위해 읽어보겠다면 비추한다. 아쉽게도 그는 여행 전문 작가가 아니라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매혹적인 여행기로서 초반에는 성공하였으나, 후반에는 실패한 책, 그것이 김영하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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