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창 틈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으~ 추워."
거실에 앉아 있다가 스웨터를 걸쳤다. 오래 입어 낡긴 했지만 촉감이 좋고, 엄마 품처럼 폭닥하다.
엄마는 뜨개질을 잘했다.
바늘 두 개가 몇 번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 자고 일어나면 나와 동생, 그리고 내가 가지고 놀던 마론인형 옷까지 지어져 있었다. 그렇게 몇 해 입다가 옷이 작아지면 엄마는 실을 풀고 꼬불꼬불한 실에 다른 실을 섞어 새로운 옷을 만들어주곤 했다. 나는 엄마가 짜 준 옷을 참 좋아했다. 엄마표 옷은 기성품과 다르게 내 몸에 맞춰 크게 입지 않아도 되고, 그 옷을 입고 나가면 어른들이 관심이 쏟아졌기에 그것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사랑은 나의 아이들에게도 이어졌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목도리, 털모자, 장갑은 물론 조끼, 텀블러 가방까지 돋보기를 쓰고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1980년대 우리나라가 뜨개 수출에 열을 올렸던 시절이 있었다. 털실을 가져다가 손뜨개로 떠서 납품을 하는 부업이 있었는데, 수입이 꽤 짭짤해서 동네 엄마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내가 살던 동네는 소그룹으로 모여 이 집 저 집을 돌며 함께 모여 뜨개질을 했다. 오늘은 우리 집, 내일을 이경이네 집, 다음 날은 남욱이네집. 엄마와 아이들은 항상 세트로 움직였다. 그날의 간식과 놀이는 집주인이 정한 대로 따랐고, 엄마들이 거실에 모여 일을 하면 아이들은 그 옆에서 실뜨기도 하고 공기놀이도 하면서 놀았다.
손가락 사이에 실을 걸고 대바늘로 한 코 두코 잡 고 나면 엄마는 남들보다 빠르게 조끼의 앞판이 완성했다.
허리와 어깨, 손가락이 아프긴 했지만 그 당시엔 그만한 부업이 없었다고 한다. 뜨개질이 좋았는지 돈 버는 게 좋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엄마의 돈 되는 취미생활은 아빠의 사업 시작과 함께 끝이 났다.
아주 가끔 털실 특유의 냄새와 먼지가 그리울 때가 있다. 엄마의 월급날 먹었던 평양상회 센베이 과자도...
요즘 다시 손뜨개가 유행이다.
할머니가 된 엄마는 눈이 어두워 바늘 코가 잘 보이지도 않는다면서도 어디선가 실을 구해와 틈틈이 수세미를 만들어 선물한다. 그러면서도 관심을 보이는 딸들에게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을 해. 내가 다 해줄 테니까.”
엄마는 자신의 어쩔 수 없었던 취미가 딸의 취미가 되는 것을 반대한다. 여자가 손재주가 많으면 고생한다는 게 그 이유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는 나는 요즘 엄마와 함께 지내온 시간들을 되짚어 보고 있다. 그것이 나와 엄마의 추억의 글이 되고, 나의 취미가 되고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