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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eal Jun 12. 2024

어제의 나에게

2022.10.05

지하철 2호선을 타보셨나요? 물론 2호선을 타봤다고 해서 모두 그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당산과 합정 사이. 그 사이를 지나야 해요.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2호선의 사람들은 작은 핸드폰 화면에 심취해 '격리'되는 중이었어요. 당산과 합정 사이에 들어서니, 지하철 칸 안으로 빛이 스며들고 시끄러운 지하철 소리도 고요해졌죠.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과 부서지는 강물에 반짝이는 햇살이 그려지면, 사람들은 격리를 해제합니다. 고개를 천천히 들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기 시작하죠. 환상 속에 빠져드는 것처럼 좁을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한 폭의 그림에 홀린 채 멍하니 바라만 보죠. 그들의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 색감에 홀리고 만 겁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낭만은 마음속 깊이 묻혔던 동심이 깨어나려는 움직임입니다.

 

우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열광하고, 마블 코믹스의 작품을 좋아하며, 하이틴 혹은 학원물을 즐깁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경험이 있는, 즉 청소년기에 대한 미련을 가집니다. 비워내는 작업이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며 그 작업이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기도 하죠. 동심에서 찾아오는 당연한 끌림을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며칠 전에 집 앞 공원길을 걷다가 꼬마 셋이서 '물병 던져 세우기'를 하는 것을 봤어요. 그 친구들은 물병을 던지며 농담도 주고받았는데, 초등학생 수준의 그 농담과 대화는 저를 웃게 하기 충분했어요. 같이 놀고 싶었지만, 아이들의 추억에 웬 아저씨라는 흔적을 남겨주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가던 길을 계속해서 걸었는데, 저도 아쉬웠나 봐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병 던져 세우기'를 함께 했던 이야기를 하며 추억 팔이를 했어요. 생각해 보니 별다를 게 없었어요. 지금도 이렇게 설레는 놀이인데, 유치하다는 이유로 부끄러운 것은 잠시였고, 두근거리는 감정이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어요.

"그래, 우리 그랬었어. 똑같네."


어릴 적 게임랜드에 종종 갔었습니다. 손에 게임 코인만 쥐고 있다면 세상이 제 것처럼 느껴지곤 했어요. 그것은 제 어린 시절이고, 지금은 그런 놀이를 즐기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왔어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저를 동심의 세계에서 밀어내고 있었던 겁니다. 최근 백화점을 여유롭게 둘러보던 중 아이들을 위한 게임 코너를 발견했어요.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고, 오히려 그곳에서 게임을 하는 것이 타인의 따가운 시선을 초래할까 봐 두려웠어요. 타인의 시선 때문도 있겠지만 어쩌면 제 자신을 바라보는 제 시선 때문에도 그랬을 태죠. 고민하던 중 저를 이끄는 손을 따라 게임기 앞에 앉게 되었죠. 그렇게 어쩔 수 없이(마지못해, 혹은 이끌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게임을 하게 됐습니다. 화면을 터치해서 무시무시한 공룡을 퇴치하고, 물총을 쏴서 좀비를 잡는 게임을 했어요. 아무런 걱정 없이 환하게 웃으며 게임을 즐겼고, 게임이 끝나니 아쉬워 미련이 생기기도 했어요. 게임을 하던 그 순간만큼은 저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순수함으로 가득한, 무수한 장애물을 웃음으로 밀어낼 용기가 있는 어린아이였어요.


사람들은 귀여운 아기가 보이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하죠. 사실 그 사랑스러운 눈빛 뒤에는 부러움이 감춰져 있어요. 때묻지 않고, 세상의 고(苦)를 깨닫지 못해 만물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어린 새싹의 시선이 부러운 것이죠. 우리는 하나씩 깨달을 때마다, 숨통이 조금씩 조여지거든요.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그랬다는 거고, 많은 친구들의 목에 새겨진 빨간 자국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방금 생각은 정말 모순적이지 않아요? 깨달았기 때문에 순수함을 잃는다니. 흰 도화지에 색을 채워가는 과정을 왜 지저분해지는 것으로 착각했을까요. 말 그대로 흑백논리에 빠져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만 바라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금 전 교수님과의 면담을 가졌습니다. 교수님께서 제가 준비하고 있는 취업 포트폴리오는 제 자신을 한 프레임 안에 가두는 느낌이 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정작 교수님께서 진행하시는 <커리어 개발>이라는 강의는 기업을 분석하고 자신의 역량을 기업에 접목시켜 취업률을 높이는 프로그램인데 말이죠. 지금의 사회가 주장하는 교육은 우리를 계속해서 수치화하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고, 우리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은 우리잖아요. 우리가 밟아온 교육 과정을 기초와 심화로 나눈다면, 기초적인 학문과 함께 이상을 가르치던 스승들이 위선자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심화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현실을 배워버린 제 시선은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 모순적인 것은 제 자신이었어요. 제 시선은 일괄적이지 못하거든요. 거울과 타인의 시선에 비치는 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관대하지 않아요. 그러나 남에게는 관대하죠. 누군가 자신의 길이 지저분하다고 말하거나 그 앞이 어두워 걱정이라고 말하면 공감을 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고, 응원의 말을 건네죠.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기에 남에게 뻗을 손조차 없었던 저는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척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런 행동이 과연 제 심성이 선량해서 일까요? 아니면 그저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발버둥 쳤었던 걸까요.

 

근데요, 제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제 안의 동심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제 곁에서 저를 응원하는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하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제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검은 먹물들이 잔뜩 튀어 흉측했던 제 도화지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제 세상에 색감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제가 겪은 일들과 쌓아온 경험은 결코 먹물이 아니었어요. 먹물이라고 여겼던 '흑(黑)'은 여러 색의 물감이었고, 제 도화지를 화사하게 장식하고 있었어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했었던 수많은 아르바이트도, 친구를 만들기 위해 참가했던 봉사 활동도, 부질없었다고 생각했던 동아리 활동도, 새벽까지 웃고 떠들며 마시던 술자리도, 아무런 영양가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인간관계까지 모두 각각의 색을 이루고 제 도화지에 칠해지고 있었어요. 꼭 근사해 보이는 대외활동과 공모전 그리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시간이 아름다운 색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세상이 막막하고 숨통이 조여오나요? 자신이 걸어온 길에 확신이 없다면, 주변에서 동심을 찾아보세요. 그 순수한 시선을 되찾을 수 있다면, 다채로운 색감이 도화지에 그려질 거예요. 자신에게 믿음이 없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겁니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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