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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eal Jun 12. 2024

OO을 찾습니다

조금은 긴, 나의 이야기.

저는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습니다. 5살에 중국 땅을 밟았고, 그 발딛음의 연도는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제가 처음 살았던 아파트 산책로는 벽돌로 꾸며졌었어요. 회색과 상아색 사이에 붉은색으로 박혀있던 벽돌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네요. 벽돌이 옹기종기 모여 그려낸 숫자, 2003. 그 해의 연도였어요. 아직도 남아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아파트 단지 안에는 한국인 원장이 운영하던 유치원이 있었어요. 얼마 다니지 못하고 다른 유치원으로 가야 했지만, 그 기억도 또렷하네요. 하나유치원. 어쩌면 유치원 옆 빵집의 냄새가 기억에 짙게 배어있는 것일 수도요. 그 이후 중국 유치원을 다녔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할게요. 오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다녔던 实验小学에서 시작된 만남과, 그 이별... 안녕까지요.


처음 초등학교를 입학했을 때, 저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어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엄마의 만족을 위해서였죠. 물론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이준기 스타일이긴 했어요. 저도 꽤나 만족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제는 처음 반 배정을 받고 아침 조회를 위한 줄을 서는데,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자꾸만 여학생 줄로 끼워 넣으시더군요. 이해는 합니다. 중국 남학생은 모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저는 중국어를 옹알이 수준으로 하는 아이었어요. 제 성별을 알리고 싶었지만, 언어로는 소통이 불가하니 남학생 줄에 서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이후 점심 식당을 향하는 줄, 하교 줄 등에서 최선을 며칠간 반복하니 선생님께서 제가 남자임을 받아들이셨어요. 아마 그것이 부모님의 영향 밖에서 제가 행했던 최초의 자아 표출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 과정에서 저를 도와줬던 친구가 있어요. 단발머리에 똑 부러지는 친구였는데, 이타적인 태도와 리더십을 보아하니 딱 반장감이다 싶었죠. 아니나 다를까, 바로 반장 선거에 출마해 뽑히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니,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그 아이가 반장을 맡았는데, 장기 집권은 중화민주공화국의 조기 교육에 포함되는 개념인가 보네요. 물론 불만은 없습니다. 그 친구 덕에 제가 남자임을 인정받았는걸요. 多谢了,小牛鑫.


제가 살았던 칭다오라는 도시에는 한국인이 꽤나 많이 살고 있었어요. 중국의 낮은 인건비를 노리고 생산 관련 사업을 시작한 한인들로 넘쳤고, 그 사이에 생겨난 수많은 회사의 관리직은 거의 모두 한국인이 독점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들의 자녀는 선택의 여지없이 유학생이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교육부에서 인가를 받아 세운 한국인 학교도 있었지만, 저희 부모님은 제 중국어 학습을 위해 저를 중국인 학교에 던져두셨습니다. 부모님과 생각이 비슷했던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자녀들을 중국 학교에 보냈고, 그 덕에 저는 한국인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생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게 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다행인 듯싶네요.


저희 부모님께서는 텔레비전을 금기시하셨어요. 미디어의 강한 중독성에 비판적이셨던 탓에 저는 티비와는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탓일까요, 지금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에 진학해 미디어와 방송 그리고 매체에 관한 학문을 탐구하네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저는 티비를 보지 못했고 1박 2일, 런닝맨, 무한도전, 웃찾사 등 예능 그때 유행하던 방송 프로그램의 내용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한국인 친구들은 쉬는 시간 또는 점심시간에 모였다 하면 전날 밤 봤었던 예능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런닝맨 놀이를 하자는데 저만 그 룰을 알지 못해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소외는 하교 후에도 지속되었어요. 모순적이지만, 한국인 친구들은 중국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한국 교과 과정을 배우기 위해 한국인 학원에 다녔어요. 저희 엄마는 제가 학교 진도를 따라가길 바라며 중국인 학원에 보냈어요. 학원이라고 하지만 사실 '지도반'이라고 불렸어요. 가정집에 10명이 넘는 학생이 우르르 모여 학교 숙제를 하고, 그 숙제를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은 한 명뿐이었습니다. 스승의 날이 되면 于선생님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화낼 때 구겨지던 미간과, 웃을 때 폭 패이는 보조개. 배가 고프다 칭얼거리면 끓여주시던 국수까지. 중국 친구들이 보는 만화책을 보고, 중국 놀이를 하고,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는 그 일부가 되었습니다. 학년이 점점 오르고 보니 그때 함께 어울리지 않았던 한국인 친구들은 중국어가 많이 서툴고, 단절된 채 그들만의 모임을 가지더군요.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말입니다.


중국 친구들과 함께 했던 모든 것이 그립습니다. 모래주머니를 던지며 맞추던 놀이, 고무줄 뛰기, 한 명이 GM이 되어 공책에 그리던 RPG,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요요와 콩알탄. 친구들과 돌려가며 봤던 만화책 <阿衰>, 그리고 출간일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偷星九月天>. 중국 만화에 입문한 것은 편견 없이 저에게 다가와준 田野百合 덕분입니다. 들밭에 피어난 백합, 그 예쁜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지도반 수업이 끝나고 엄마를 기다리며 늦게까지 그 친구와 만화책의 내용을 토론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아직도 그 친구들이 추천해 줬던 노래를 듣고, 흥얼거립니다. 그렇게 계속 떠오릅니다.

며칠 전 그 친구들의 근황이 궁금해 그 시절 사용하던 SNS QQ에 로그인했습니다. 물론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카카오톡'과 '버디버디'가 공존하는 세상에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만남과 추억이 너무 예뻐서, 이별을 부정하려는 심상이었습니다. 이별이 아니라고 말하렵니다. 끊어진 것일 뿐, 그 누가 나서서 끊은 것이 아니니까요. 조금은 긴 안녕이라 여겨봅니다. 그 친구들이 이 세상 어디선가 나와의 시간을 추억하길 바라며, 마음에 온기 잔뜩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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