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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선생 Aug 24. 2023

음식이 가지는 힘

'엄마 박완서의 부엌'을 읽으며 할머니를 떠올리다

나는 또래에 비해 유독 음식과 요리 과정, 그리고 식재료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여기엔 외할머니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우리 집에서 먹는 참기름, 들기름, 간장, 된장, 고추장과 같은 조미료에서부터 파, 마늘 등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재료는 모두 할머니가 직접 기르고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다 정체 모를 유리병이나 소주병 같은 곳에 담겨 이름표를 붙이고 있다. 외가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려보면 길을 가다가 쑥이 좋다고 차를 세우고 다 같이 쑥을 뜯고, 봄에는 냇가에 가서 다슬기를 잡고, 가을에는 할아버지의 산에서 밤을 주워서 쪄 먹는 패턴이 매년 반복되었다.


할머니가 보내주신 참기름, 들기름, 된장, 국간장, 갈치액젓

 

보통 나이 든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제철 음식이나 제철 생선을 줄줄이 꿰고 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맘때가 되면 이게 맛있는데..' '지금 계절에 이걸 꼭 먹어줘야 하는데..' 등 공기의 온도가 바뀌면 그 시기에만 잠깐 나는 식재료와 그에 맞는 조리법이 생각난다. 그럴 때 큰 마트에 가면 제철 식재료는 어김없이 일 년 중 가장 신선한 상태로 가장 싼 가격에 진열되어 있다.


음식은 섭취하는 순간 내 몸의 일부가 된다. 요리에 유난히 그리움과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는 건 먹는 것이란 말 그대로 나의 피와 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음식에 대한 기억이나 조리법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 박완서의 부엌'은 박완서 선생님의 첫째 딸인 호원숙 작가가 엄마의 음식과 글을 떠올리며 가벼운 에세이처럼 쓰신 책이다. 요리에 얽힌 에피소드와 그에 상응하는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 중 일부를 인용하며 삶의 단편이 어떻게 소설이나 수필 속에 녹아들어 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련하고 불확실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어머니의 글 속에서 선명한 그림으로 되살아난다.

 

생선은 으레 졸이거나 절이거나 고추장찌개를 하는 줄 알았는데 준치로는 맑은 장국을 끓였다. 새파란 쑥갓과 실파가 동동 뜬 준칫국은 하나도 비리지 않고 깨끗하고 감미로웠다. -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세계사, 2012

 

오래전 어머니가 보시던 요리책에서 준칫국을 발견했다. 레시피는 의외로 간단했지만 그래서 더욱 위엄이 있어 보였다. 

 

'이것은 맑은 장국에 끓이는 것이니, 끓이는 법은 이 우에 생선국과 같으니라. 미나리와 파를 많이 넣고 끓이나니라.' - 방신영, 조선요리제법(1942) 중에서

 

나의 기억은 미나리가 아니라 쑥갓이었는데. 엄마의 글에도 역시 쑥갓이었고. 우리 모녀만의 기억의 일치라고 할까.



좋은 맛에 대한 기준, 섬세한 미각, 요리에 대한 탐구심은 대를 이어 전해진다. 준칫국에는 미나리가 아니라 쑥갓을 넣어 요리했던 박완서 선생님과 그의 따님. 아마 그분의 자식들도 준칫국에는 미나리가 아닌 쑥갓을 넣어 조리하겠지.

 

재밌는 점은 모든 사람들이 내 음식은 엄마의 요리 맛에 미치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들의 자식은 또 자신의 엄마 손맛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각자의 엄마가 낸 맛을 최상의 기준으로 삼고 평생 거기에 가까워지기 위해 요리를 하며 늙는 것 같다.

 

무타협의 미식가이자 서예가, 도예가이기도 한 일본인 기타오지 로산진은 '요리에 대한 마음가짐(미식의 세계에 들어선 이들은 위하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음식 맛을 음미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림을 감상하고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일과 같다. 음식을 만드는 이 스스로 맛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타인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그림도 마찬가지로, 모두 자기 자신이 기준이다. 자신에게 다섯의 능력이 있으면 다섯만큼의 맛을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의 실력이 상대보다 위라면 상대의 실력을 쉽게 간파할 수 있고 스스로 여유를 갖게 된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그림을 보는 안목이 높으면 같은 명화라도 자기 나름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림은 보는 자신의 안목을 훨씬 뛰어넘는 작품이라면 그 아름다움을 완전히 맛보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맛을 익히는 과정도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과 같다. 그 깊이를 알아가려는 본인의 노력이 지속되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우리 할머니는 내 요리 실력을 칭찬하시면서, 맛있고 제대로 된 것을 많이 먹어봤기 때문에 좋은 음식을 할 수 있는 거라고 하셨다. 기타오지 로산진이 말했던 '자신에게 다섯의 능력이 있으면 다섯만큼의 맛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할머니는 본인이 대학에 갔다면 분명 요리 연구가가 되었을 것이라며 지금도 안타까워하신다. 나도 그것이 아까워서 틈날 때마다 할머니가 밭을 돌보는 모습, 요리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글로 기록해두고 있다.

 

언젠간 호원숙 선생님처럼 나의 할머니의 요리에 대한 책을 쓸 수 있을까?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서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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