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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선생 Jan 01. 2024

새해 첫날의 목욕

개를 위한 노래 (메리 올리버 시집)

지난 2주 정도 몸이 계속 안좋았다. 눈병으로 시작해 오한과 근육통, 인후통을 거쳐 급기야 수요일부터는 목소리가 아예 안나오기 시작했다. 평소 잔병치레가 잘 없는 나로서는 황당한 경험이었다. 어제부터 겨우 목소리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약 나흘간 침묵 속에 살아보니 편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일단 산책하면서 우리 개를 보고 말을 거는 사람들에게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힘을 얻었다. 입을 열고 뻐끔거려도 쇳소리만 나오니 다들 대화를 이어가지 않는다. 편하다. 평소에도 이렇게 무응답으로 일관해도 될것을. 그치만 누군가 말을 걸면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되는걸.. 그런 생각에 목소리가 안나오는 상황을 즐겼다.


불편한 점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은데 말이 안나올 때였다. 그럴때는 정말 개미만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서 바로 내 옆에 오게 한 후에 내 속마음을 전달했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잔소리를 하는 내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큭큭거렸다. 큭큭 웃으면 어김없이 기침이 나왔다. 이렇게 아픈데도 할말이 많은 내 자신에게 놀라기도 했다. 새해엔 그에게 덜 예민하기로 약속했는데. 목소리가 돌아오더라도 목소리를 잃었던 때처럼 잔소리를 줄여야겠다.


남편이 처음 벤티를 만났을 때, 원래 저렇게 개가 조용하냐고 나에게 물어봤었다. 애가 품위 있는 성격이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묵언수행하는 사람같다며 신기하다고 그가 말했다. 우리집 개는 평소에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 같다. 신기하게도 하고 싶은 말은 정확하게 전달하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 맥락을 이해한다.


오늘은 목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오후에 몸이 좀 찌뿌둥해서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남편이 오랜만에 목욕을 하는건 어떨지 제안했다. 하긴, 우리집 욕조를 안쓴지도 꽤 됐다. 얼른 욕조를 청소하고 물을 받았다. 최근에 선물받은 얇은 시집이 있어 화장실에 들고 들어갔다.


그후 약 30분 동안 음악을 들으며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물과 수증기의 울렁거림이 내 몸을 앞뒤로 밀었다가, 당겼다가 했다. 시집은 개에 관한 것이어서 나에게 완벽한 읽을거리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들이 각각 서로 다른 개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목욕을 하고 나오니 몸은 기분 좋게 데워졌고 기분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한 해의 첫 날에 할 수 있는 것들 중 최고의 일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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