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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어PD Nov 09. 2023

#12. 제2의 인생은 전쟁

30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건 누구의 압력도 아닌 내 의지였다.  


매일 아침 6시에 눈을 뜨고 출근 준비를 하고 똑같은 노선의 지하철을 타고 때가 되면 점심을 먹고 퇴근을 했다. 한 달에 한번 마약 같은 월급이 나오고 회사에서는 싫지도 좋지도 않은 일이 주어졌다. 하나의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이 나를 반겼다. 때로는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에 우쭐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하나마나한 누구도 모르는 일을 하면서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에 나는 좋은 아빠, 안정적 직장에 다니는 남편이었다.  

정년이 65세로 늘어난 바람에 가족들은 좋아했지만 나는 즐겁지만은 않았다. 누구 맘대로 정년을 늘리는 것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창 젊었던 서른 살에 회사에 들어와 30년의 청춘을 한 회사에서 보내고 이제는 나의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5년을 더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제일 반긴 건 회사였다. 회사입장에서는 앞으로 5년 동안 돈이 더 나가야 하는 ‘비용’ 거리가 바로 나였다. 퇴직의 조건으로 받은 돈은 퇴직금을 빼고 3억이었다. 드라마 속 재벌집 사모님이 아들과 사귀는 가난한 여자에게 돈봉투를 주며 포기하라고 협박하듯, 회사는 당당했다. 뭐 이 정도 돈이라면 당당할 만하다. 그나마도 정년이 추가로 5년 연장된 덕분에 받을 수 있는 돈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퇴직금만 받고 정년퇴직 할 상황이었다. 검사 출신 대통령이 꼴 보기 싫어서 뉴스도 끊었었는데, 덕분에 퇴직 위로금까지  받았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족들은 별 다른 동요가 없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나 회사 그만두고 버스 운전할 거야.”  

“정말? 우리 그럼 아빠 버스 타고 놀러 가도 돼?”


서른이 넘은 딸과 집사람은 나를 지지해 줬다.


“당분간 일할 생각은 말고 좀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봐. 양평에 좀 가 있던지, 나 신경 쓰지 말고 당신 하고 싶은데로 해. 당신 30년 동안 일하느라 고생 많았잖아.”


속으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둘 다 나를 이해해 주고 위로해 줬다. 고마웠다.  

  

양평에 땅을 산건 집사람이 원해서였다. 땅을 산다는 게 생소했지만 거의 매주 땅을 보러 다녔다. 가평, 파주, 남양주, 포천, 양평 등 많은 곳을 다녔다. 집에서 차로 1시간 이내 거리의 땅이 타깃이었다. 그중 우리가 가진 예산에 맞고 목적에 부합하는 땅이 양평에 있었다.  

땅을 산 이후, 우리 부부는 거의 주말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무 한그루를 심고 커가는 걸 보면서 행복했고 게임 속 캐릭터를 키우듯 농막에, 담장에, 지하수에… 아이템을 하나씩 추가했다. 물론 현질이 필수이긴 했지만 딸도 다 커서 취직도 했고, 우리는 큰돈이 들어갈 일이 없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우리의 ‘자본주의 정원’은 점점 업그레이드 됐다.  

집사람 말대로 퇴직 후 난 거의 한 달을 양평에 있었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소음이 없다는 점이다. 새소리와 바람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막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이곳에도 인가가 있어서 가끔 공사소리와 사람들 말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대부분 ‘정막’하다. 잔디밭에 책상과 의자를 놓고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잡초를 뽑고 가지치기를 하면 하루가 지나갔다.


3주 정도 양평에서 혼자 지내면서 30년의 회사생활을 그렇게 마음에 묻었다.


서울로 돌아오자, ‘두 여인’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을 먹을 때, 딸이 물었다.


“근데 아빠 버스 운전한다고 하지 않았어?”  

“이 양반이 원래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걸 싫어했어, 이번에 3주 동안 양평에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니까. 당신, 양평에 있었던 거 맞지? 두 집 살림하고 그런 거 아니지?   

“엄마가 가라고 해놓고는 별소리를 다하시네요~”  

“암튼 그래서 이분은 새로운 일을 한다면 운전하는 일이 딱인 거 같긴 해”  

“앞으로 운전이야 이제 로봇이나 AI가 다 할 텐데 굳이 아빠가 할 필요 있나 싶어서 그렇지…”  

“야 니 아빠가 뭐 돈 벌려고 하는 거냐? 여기저기 다니고 싶은 거야. 그치 여보?”


내 이야기를 나 빼고 둘이서 신나게 주고받다가 순간 나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맞아, 30년을 맨날 똑같은 데만 왔다 갔다 했더니 얼마나 지루했는데. 난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어”


2초간 정적이 흘렀다. 농담 삼아 던진 말이지만 두 사람에겐 가슴 아픈 말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어쨌든 그날로 대형버스 면허 시험을 준비했고 한 번에 붙었다. 고3 겨울방학 때 2종보통 면허증을 딴 후로 오랜만에 면허시험장을 갔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대형면허는 그냥 돈만 내면 되는 것 같다. 필기시험도 따로 없고 학원에 등록해서 80만 원을 내고 학과교육 3시간, 기능교육 10시간을 받았다. 그리고 주행시험 없이 장내시험만으로 1주일 만에 대형면허증을 땄다. 한 번의 낙오 없이 합격하자, 자신감이 붙었다. 만약 시험에서 떨어졌다면 집사람과 딸에게도 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자율주행이니 뭐니 기술이 급발전했다지만 운전기사를 뽑는 곳은 꽤 많았다. 회사 통근 버스나 아이들 등하교 버스부터 버스는 아니지만 장애인택시기사를 뽑기도 했고 마을버스에서도 사람을 뽑았다. 마을버스로 경력을 쌓은 후 시내버스나 고속버스로 간다고들 한다. 이도저도 마음에 안 들면 내 돈으로 버스를 사서 프리랜서처럼 뛰어도 됐다. 산악회나 야유회, MT, 동호회 등 버스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았다. 세상에 이런 삶의 방식도 있는데 30년을 하나만 알고 살아온 게 아쉬웠다.


“여보, 근데 당신 회사 그만둔 지 이제 두 달도 안 됐는데 바로 일 시작할 거야? 최소한 1년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 사표가 수리되고 남은 휴가까지 모두 몰아서 쓴 후, 이제 더 이상 회사원이 아닌 시점부터 지금까지 가만히 있질 않았다. 내 몸은 노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무언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며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는 목표가 없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다.


그날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등산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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