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었다.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길을 걸었다.
장터에서 일을 보고 간단하게 저녁 한 끼를 해결하고 길을 나선다는 것이 오주리 살다 읍내로 이사한 김 아무개를 만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어느새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밤이 깊었으니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가라는 김 씨의 말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간이 그렇게나 흘러있었던 것이다.
한밤에 구슬프게 우는 두견새 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하고 나뭇가지 부대끼는 소리에 놀라 가던 길을 멈칫멈칫하며 걷다 보니 마누라가 며칠 걸려 만들어준 삼베저고리를 입은 등짝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젯밤에도 훤히 밝았던 달이 오늘은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는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자 걷는 허서방의 심장이 쉴 새 없이 쫄깃거렸다.
동네 방앗간 드나들듯이 이틀이 멀다 하고 걸었던 이 산길을 캄캄한 밤길에 혼자 걸으려니 이상하게도 낯설고 무서운 마음이 왈칵 들었다.
그때 구름에 가려있던 달빛이 잠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저만치 앞에 어떤 형체 하나가 어른거렸다.
순간 움찔 놀라 걸음을 멈추고 호흡마저 참아내며 죽은 듯이 섰는데 자세히 보니 기이한 달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나무사이를 부지런히 걷고 있는 사람이었다.
허서방의 동네사람들은 장 을 보러 가고 올 때 이 산을 지름길로 이용하였기에 아마도 앞서 걷는 사람은 같은 동네 사람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던 참에 갑자기 앞서 걷던 사람이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저이는 분명 큰길 신작로 입구집에 사는 송봉회 가 맞다'
"어이~~ 봉회 같이 감세, 나 명길이여"
"어, 명길이 형님 장에 다녀오시는 길 인감요? 빨리 오셔요"
허서방은 비로소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등에 짊어진 괴나리봇짐을 한번 추켜 메고 뻣뻣해진 뒷목을 누가 잡아챌세라 바쁜 걸음을 빨리 했다.
매끄럽지 못한 산길 바닥에 춤추듯이 허공에서 허우적 대던 발걸음을 간신히 붙잡으며 정신없이 뛰었지만 이상하게도 봉회와 의 거리는 좁혀지지가 않았다.
"어이 봉회~~~ 조금만 기다려 주게 같이 감세"
허서방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고 그럴 때마다 봉회는 " 빨리 오셔요 형님 ~~~" 대답만 할 뿐 멈춰 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하늘은 새벽이 오고 있음을 알리듯이 부옇게 밝아지고 있었다.
밤새 무서움에 시달렸던 허서방은 마침내 집에 돌아왔고 송봉회 를 만났던 에피소드를 꽤씸한 마음으로 마누라한테 털어놓았다.
다음날 우연히 큰길 신작로에서 송봉회를 만난 허서방은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쓴소리를 한마디 했다.
"봉회, 어제 새벽 그렇게 같이 가자고 소리를 쳤는데 걸음도 멈추지 않고 간 이유가 뭔가"
봉회는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형님, 무슨 소리요?" 대답하니 원래 튀어나온 눈 덕에 개구리 눈이라고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받던 두 눈이 오 센티미터는 더 앞으로 튀어나온 듯했다.
"어제 읍내 장터에서 칠암산으로 해서 집으로 오지 않았나? 자정 넘은 시간에"
"아이고 형님, 어제는 먼 논에 나가서 하루종일 풀 뽑고 일하느라 어디 간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대요?"
일치감찌 저녁을 먹고 해시도 못돼서 곯아떨어졌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는 폼이 거짓부렁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거의 눈치채셨겠지만 이 얘기는 산길을 걷다 도깨비를 만난 이야기이다.
어릴 적 아빠가 지어낸 얘기겠지만 누구누구 가 겪은 얘기라며 우리들에게 해주신 이야기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설화 속에서 존재하는 도깨비를 떠올리면 그 여름밤을 서늘하게 만들어주셨던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듯하다.
내가 어릴 적 여름밤은 지금처럼 무더운 열대야는 없었지만 한낮동안 뜨거운 햇살에 달구어진 시멘트 바닥의 마당만큼은 밤이 돼도 좀처럼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마당 한편에 있는 수도꼭지를 열어 호스를 연결하고 한참 동안 물을 뿌려준 다음 아빠가 직접 제작한 나무 평상을 마당 가운데에 내놓는 것으로 여름 저녁의 행복한 한때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우리 형제들은 평상에 앉고 눕고 특히 막내였던 나는 아빠가 해주시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말 좋았다.
평상 아래쪽으로 놓은 모깃불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까만 하늘을 향해 춤을 추듯 올라가고, 엄마 무릎을 베고 누우면 엄마는 쌀을 담았던 비닐 정부미 포대로 만드신 부채를 들고 살랑살랑 내 얼굴을 향해 부채질을 시작하셨다.
깜깜한 밤하늘엔 비처럼 쏟아지는 별이 가득했고 시골집 마당에서는 한낮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토닥이기 위해 모인 가족들의 얘기소리가 밤늦도록 멈출 줄 몰랐다.
무더위가 지칠 줄 모르고 기승을 부리는 요즘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했고 전설의 고향보다 짜릿했던 아빠의 그 시절 황당했던 옛날얘기가 가끔 생각나 혼자서 미소 짓곤 한다.
며칠 전부터는 제법 차가워진 새벽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계절의 절기는 못 속인다는 어르신들 말씀에 절대적으로 공감하면서,
'이 여름도 잘 보내고 있구나' 감사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