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면허 운전은 이제 그만~~
'드드드~득....'
깜짝 놀라 내가 앉은 조수석에서 밖을 내다보니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리 차의 뒷바퀴 옆을 긁으면서 미끄러지다 멈추었다.
10월이 시작되고 토요일 출근을 한 지 4주가 지나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가 몸이 근질거리다며 이번주 말 토요일엔 일찍 만나 우리가 자주 가는 저수지 데크길을 한 바퀴 돌고 이른 점심을 먹자고 금요일 퇴근길 전화를 했다.
거의 한 달여 만에 제대로 바라보는 가을의 색채는 이미 많이 무르익어 있었지만 반쯤은 초록으로 남아있는
은행나무의 잎들이며 자연스럽게 물들지 못한 나뭇잎의 색들이 아직도 여름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는 듯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계절이 유종의 미를 채 거두지 못한 채 서성대니 새로운 계절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마음도 아직 여름과 가을의 어느 지점에서 한없이 흔들거리는 기분이다.
친구와 만나 그동안 일어났던 일로 연신 수다를 떨며 한 참을 걷다 보니 여태껏 내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나는 걸으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로 고민이 깊어질 때, 해결하지 못한 일로 압박을 받을 때, 남편과 이런저런 일로 다투었을 때,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울적할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걸음에 수시로 나를 맡기곤 한다.
그러다 보면 정해놓은 루틴이 아닌 마음이 가는 대로 내딛는 발걸음에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생각의 파편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은은한 햇살이 내리쬐어 반짝이는 윤슬 가득한 호수 위로 한 곳을 응시하며 외로이 서있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도, 동네 어귀 감나무에 잔뜩 매달린 채 익어가고 있는 주홍빛 감 들도, 손을 스치면 코끝을 맴도는 알싸한 국화향기도, 어느 단체에서 모인 사람들 손에 들려있는 간식거리 작은 봉지에서도 가을은 이미 나의 곁에 깊숙이 와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나마 가을을 맘껏 느끼고 적당한 노곤함에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시골 작은 마을의 초입에 있는 다리 하나를 막 지나고 있었다.
루틴처럼 자주 오는 곳이지만 행락철이고 유명산이 근접해 있어선지 많은 차들이 그 좁은 도로에 꽤 많이 있었다.
막 다리를 건너고 시장입구에 있는 과일가게를 지나치려는 순간 우측에서 차표면을 긁는 기분 나쁜 소음이 느긋하게 들려왔다.
빨강색 농업용 사륜 오토바이를 탄 -한눈에 봐도 나이가 많이 드신- 어르신 이 우리 차의 뒷바퀴 부근에 본인의 오토바이를 자연스럽게 -마치 그곳에 우리 차가 없다는 듯이 - 밀착시킨 채 멈추어 있었다.
깜짝 놀란 친구가 운전석에서 빠르게 내려 '어르신 차를 보지도 않고 그렇게 나오시면 어떡해요?'라고 말했고 어안이 벙벙한 어르신은 그제야 얼른 오토바이를 뒤로 뺐다.
다행히 차의 속도가 20킬로미터를 넘지 않았고 오토바이도 미끄러지듯 차에 닿은지라 어르신이 다치지 않은 것에 우리와 주변에 있던 상인들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차 아래쪽에 살짝 스크래치가 났지만 거의 표가 나지 않을 정도였고 오토바이도 앞바퀴의 뚜껑 부분에 약간의 스크래치가 난 것 말고는 딱히 이상은 없어 보였다.
다친 사람이 없고 우리의 잘못이란 생각은 들지 않아 빨리 상황을 마무리하고 가려했으나 어르신의 의사표현이 분명치 않고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곳이 사람들 거의가 모두 아는 사이인 특성을 가진 시골마을이라는 것이었다.
목격한 모두가 어르신 잘못이라고 말은 하고 있었지만 확실한 사고 수습을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가 차후에 있을 혹시 모를 역전으로 상황이 뒤집힐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과일가게 사장님이 우리가 우려했던 바를 슬며시 입 밖으로 꺼냈다.
'여기는 시골이고 말이 많은 곳이니 내일이라도 누군가 어르신을 부추겨 다른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우리는 그 순간 '아, 그냥 이대로 가서는 절대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어르신은 핸드폰도 집에 두고 나오셨는지 소지하지 않았고 자제분들의 연락처를 물어도 모른다고만 하셨다.
그 좁은 도로에 큰 차가 그대로 정차해 있으니 양쪽에서 진입하는 차들은 빵빵 대다 못해 손가락으로 뭔가를 지시하며 뜻 모를 제스처를 취하고 이미 오토바이를 빼 버린 상태에서 그대로 차를 두는 것이 의미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선뜻 차를 한쪽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어르신 상태가 온전치 않아 보였는지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과일가게 사장님은 "나도 저럴날이 멀지 않았겠네 쯧쯧" 하며 자신이 겪게 될지도 모를 미래의 어느 한 날을 상상하는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어르신의 가족들 연락처를 몰랐기에 결국 근처에 있는 파출소에 연락을 했고 무슨 행사 때문인지 근처 산에 있다던 경찰들은 20분이 넘어가도 도착하지를 않고 있었다.
다시 한번의 재촉 전화 끝에 차를 옆으로 옮겨도 된다는 허락을 구한 뒤 그제야 우리는 차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그로부터도 약 10여분을 기다리다 지쳐갈 무렵 작은 접촉사고의 진위파악을 위해 출동한 인원이라고 보기엔 꽤 많은 4명의 경찰관이 도착했다.
어쨌든 그들이 와서 수첩을 꺼내 들고 어르신에게 묻고 우리에게 묻고 사진을 찍고 이리저리 오토바이를 훑어보고 차 번호를 적고 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현장은 정리되고 사건은 수습되는 모양새가 되어갔다.
"어르신, 다친 곳도 없고 어르신이 잘못하신 거니 오토바이 흠집 난 거는 어르신이 고치는 걸로 하고 이분들이(나와 친구) 사고 접수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시니 하지 않겠습니다 됐지요?"
어르신은 제대로 들었는지 어쨌는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그 걸 본 경찰은 어르신이 품에서 꺼내 건넨 -종이박스를 길게 찢어 그곳에 적은 전화번호(아마도 본인의 전화번호인듯한)와 친구의 전화번호를 메모하고 우리에게 갈길을 가도 된다고 -마치 우리의 잘못은 없다는 면죄부를 다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얘기했다.
우리는 그사이 안면을 튼 과일가게 사장님 부부와 줄곧 그곳을 지켰던 오토바이 상사 사장님 등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셨던 모든 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그날 우리는 그렇게 작은 시골 시장길 한 복판에서 우왕 대며 좌왕 대며 익어가는 가을의 햇살이 구름뒤로 들쑥날쑥 대는 모양새를 간간히 바라보며 한 시간 여를 서 있었다.
이제 그 길을 지날 때면 시골사람들의 특성을 얘기해 주던 과일가게 사장님이며 뭐 이 정도 일에 경찰까지 부르냐며 그 어르신께 오토바이를 판매했던 가게의 사모님 또 까만 때가 잔뜩 끼어있던 나무의자에 앉아 우리 편도 어르신편도 아닌 중립을 지켰던 역시나 얼굴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던 중년 아저씨도 모두 생각날 터였다.
어르신은 그 후로 오토바이를 다시 운전하실까?
나는 진심으로 그날 어르신께 말했다.
"어르신 앞으로 오토바이 운전 하지 마세요, 면허증도 없고 눈도 잘 안보이시고 큰일 나요, 절대 운전하지 마세요 아셨죠?"
어르신은 우리의 마음을 알까?
몇 해 전 오토바이 면허증을 반납했지만 아직도 그 빨강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에도 몇 차례 씩 그 시골길을 왕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우리가 경찰에게 절대로 그 말은 하지 말라고 주변사람들의 입단속을 하고... 그것이 밝혀질까 봐 혹시 몰라 사고 접수도 하지 않았던 우리의 마음을 말이다.
***어르신이 다시는 오토바이를 타지 않길 바라며 이 글을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