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아플 만큼 웃었으면 됐지요
친구 엄마가 소위 말하는 약장수들의 꼬임에 넘어가 무려 99만 원짜리 철갑상어 연골로 만든 건강식품을 통 크게 질렀다고 한다.
그 일로 친구포함 형제들은 엄마가 빠진 단톡방에서 엄마가 당한 얘기들로 입씨름을 하다가 친구를 제외하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진위여부를 파악하고 앞으로 절대 그러지 말라고 마음 단속을 단단히 시켰단다.
친구는 엄마를 나무라는 대신 경찰서에 신고하는 방법으로 나름의 조치를 취해봤지만 그분들이 하는 판매가 합법적이고 구매자들에게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지 않는 점에서 사기가 될 수 없다고 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나마 친구의 엄마가 지불한 금액은 적은 액수에 해당하는 것이며 몇백만 원짜리 약을 산 노인들도 많고 그중 누군가의 자식은 그 회사의 본사에 올라가서 힘겹게 환불을 받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며칠이 지난 후 친구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거기 다니는 동안 엄마가 즐겁고 행복했다면 그 돈으로 그 값을 지불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다음에는 절대로 사지 마, 알았지?"
우리 엄마가 살아계셨던 오래전에도 나는 똑같은 상황을 겪었고 주변에서 들리는 똑같은 얘기들을 들었던 것을 생각하며 노인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일이 성행하다가도 매스컴에서 떠들어대거나 나쁜 놈들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적으로 조성되면 슬며시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기도 하는데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들의 약발이 성업 중인걸 보면서 어느 괴물영화의 숙주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그들의 영업스타일에 경외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타지살이를 할 때면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하는 일이 많아진다.
더운 여름이 되면 한낮 뙤약볕 들에 나가 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한겨울 추위가 매서울 때면 이른 아침 밖에 나갈 때 모자 쓰고 빙판길에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다니라고 자식에게 잔소리하는 엄마 마음이 되어 엄마를 주의시키느라 말이다.
농번기가 끝나고 바쁜 일이 없어지는 한가한 때가 되면 시골의 노인들은 하나 둘 마을의 경로당에 모여 앉아 뉘 집 아들이 해온 떡이며 과일을 먹거나 정부에서 노인들의 숫자만큼 지급되는 지원금으로 구매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이 집 저 집 자식들의 신상털이에 나선다.
우리 자식은 대기업을 다니는데 돈을 얼마 번다든지 우리 며느리는 생활력이 강해 돈을 얼마큼 모아놨다든지 또 그 반대로 그 집 자식은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 그 당시에 서른은 지금으로 치면 마흔 정도 되는 - 아직 장가를 못 갔다든지 아랫마을 어느 집 자식은 나이 마흔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철이 안 들어서 부모 속을 썩인다든지 하는 이 마을 저 마을 온갖 마을의 자식들이 엄마들의 드라마에 총출연을 하게 된다.
딱히 자랑할 거리가 없는 자식들을 둔 우리 엄마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 맨날 자식들 자랑만 늘어놓고 듣기 싫어서 이제 노인정 그만 가련다" 했던 말이 생각난다. ㅋ ㅋ
지금이라면 엄마에게 " 엄마, 그래도 아직까지 결혼 못하고 도박하고 그런 자식은 없잖아?" 하며 엄마를 눙쳤겠지만 그때는 정말 내가 결혼을 못하고? 안 하고 있었기에 엄마의 의기소침한 마음에 나도 한몫 거든듯하여 염치없는 마음이 잠깐 들기도 했었다.
그렇게 자식들의 얘깃거리에도 조금씩 흥미가 없어질 무렵, 때는 이때다 싶게 나타나 노인들의 떨어진 사기를 단 한 번에 낚아채 청취율 100%로 끌어올리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 시기동안 우리 집 자식들의 안부는 항상 " 엄마 또 거기 갔어 아빠?" 하고 묻는 것이었다.
초저녁 잠도 많던 우리 엄마가 시골에서는 한밤중이라 부를 만큼 깜깜해진 시간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웬일인지 할머니들끼리 뭉쳐 쓸데없는 애기나 한다면서 경로당 가는 것도 별로 반기지 않던 아빠마저 암묵적으로 엄마의 일탈 행위를 눈감아 주고 있으니 이상할 따름이었다.
한 번은 집에 내려갔는데 오랜만에 온 이쁜 막내딸인 나를 두고 엄마가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길을 나서는 것이었다.
"엄마, 같이 가, 나도 구경 가고 싶어" 하며 엄마를 따라나섰다.
우리 동네도 아닌 한참을 걸어 도착하는 옆동네의 어느 공터에 천막 같은 것 을 쳐놓은 -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큰 공간이었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우리 엄마 또래인 60대 이거나 더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태반일 줄 알았는데 그 보다 훨씬 젊은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한 시간여 동안 그분들이 뿜어내는 입담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졌고 입안의 혀처럼 구는 그분들 앞에서 어르신들은 웃었다 울었다 하며 기쁨과 슬픔 어느 중간쯤에서 끊임없이 속을 비워내고 있었다.
남편일로 속이 상한 사람이든, 자식일로 속을 끓인 사람이든, 다리가 아파 엉거주춤 앉아있던 사람이든, 그곳에서는 조금 전의 일도 기억 못 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이 되어 그저 끊임없이 웃을 수밖에 없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이쁜 짓하며 웃겨주고 살갑게 굴던 그들이 슬슬 예민할 수밖에 없는 자식들 의 얘기를 꺼낸다.
자식들의 성공여부에 따라 노인들의 주머니가 열리고 닫힌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며 이상한 경쟁심리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때로는 얼떨결에 때로는 옆집 할머니에게 지기 싫은 오기가 발동하여 또 간혹은 거의 저승문에 가까이 간 사람도 일으켰다는 약효라는 말에 혹 해서 서둘러 지갑을 열게 되는 노인들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끌벅적했던 공연의 막을 내릴 때 그들은 노인들을 절대로 절대로 빈손 들려 보내지 않는다.
오늘은 지갑을 열지 않았던 미래의 고객들을 위해 양손 가득 두루마리 휴지며, 큰 대야며 소쿠리 등 참 적은 금액이지만 부피만큼은 커서 뭔가 대단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들과 함께 보낸다.
돈 쓰는 것을 싫어했던 우리 아빠도 하루하루 달라지는 선물의 크기와 다양성에 미혹되어 엄마의 밤길을 은근슬쩍 허락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때는 그들이 판매하는 단위가 그리 큰 금액은 아니어서 우리 자식들은 엄마가 어두운 밤길을 걸어오다 넘어져서 다치고 추운 바람에 감기 들까 봐 그것을 더 우려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저 엄마가 몇 개월 동안 행복하고 지친 삶의 위로를 그들에게서 받았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돈이 삶에 우선순위이고 또 누군가는 절대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웃음, 즐거움, 행복에 우선순위를 매겼다면 그들이 지불했던 것은 그저 종이조각에 불과한 -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는 절대적인 가치가 되었을 수도 있는 - 하찮은 지물에 다름없었을 것이다.
'상리공생'이란 단어가 있다.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공생이란 것인데 이 말이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자식이 그들처럼 따듯하게 웃어주고 이쁜 짓해주고 그럴 수 있냐?" 했던 친구 엄마의 말처럼
비록 그것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된 가식적인 행동이었다 해도 그 순간만큼은 그들 사이에 진심이 통했고 큰 소리를 내어 맘껏 웃고 즐겨도 되는 당당한 권리를 부여받은 엄마들이 그곳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도 그때 그랬었냐고, 그래서 그렇게 험한 밤길 마다하지 않고 그들과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었냐고 진지하게 묻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