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음의 미학

못 버리는 남자

by 피노

작년 여름 더위에 진이 빠져 올해 에어컨을 새로 장만했다.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부터 사용했던 소형에어컨은 소음으로 인해 잠들 때 켜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남편이 그 에어컨을 거실로 들고 나와 뭔가를 뿌리고 닦아내고, 그러기를 몇 차례 하더니 에어컨이 새것으로 변신하였다.

중고거래에 올려서 판매할 거라고 했다.

남편은 꼼꼼해서 어떤 물건이라도 깨끗하게 관리하고 사용하는 편이고 나는 가끔 그런 남편에게 궁상맞다고 싫은 티를 내곤 했었다.

하여튼 남편의 노력으로 삐까 삐까 광이 난 에어컨은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리자마자 판매가 되었다.

우리가 산 가격의 반 값보다 조금 더 받았다.




몇 년 전 남편이 운영하던 사업체를 폐업하려고 준비할 때 많은 기구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난감했었다.

폐업을 앞두고 얼마 전부터 기구들을 분류해서 정리하고 버리고 할 일이 참 많았다.

어느 날, 그곳에 들어서다 몸을 잔뜩 구부리고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남편의 등을 보았다.

그날도 여전히 기구들을 닦고 분해하고 내가 온 줄도 모른 채 일에 열중하고 있는 남편을 보니 마음 한쪽이 짠해졌다.

오랫동안 본인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남편의 마음은 시원했을까 섭섭했을까?

무엇을 하든 항상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사람들에게 쏟았던 애정이 컸으므로 섭섭한 쪽이 조금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쪽에 관련된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게에 방문해 기구들을 무료로 가져가기도 하고 또 제법 덩치가 큰 것들은 얼마 큼의 값을 받고 팔기도 하였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물건이 판매될 때마다 나는 기분이 좋았었다 남편 속도 모르고.

모든 것들이 그렇게 정리가 되고 쓸모가 있는 몇 가지는 집으로 들여와 한참 동안을 우리와 함께했다.

그 무렵 남편의 꿈은 몇 년 후 헬스장 하나를 운영하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가게 운영이 잘 되지 못해서 그 꿈은 남편의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본인이 좋아하는 운동도 맘껏 하면서, 사람들에게 운동을 가리키는 것도 좋아하는 남편한테 잘 맞았을 텐데 말이다.

나도 남편을 만나면서 스쾃이니 데드리프트 니 생소한 근력운동들을 배웠다.

지금은 헬스장을 다니면서 좋아하는 운동을 하고 나에게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우리 집의 모든 물건들은 남편의 손을 만나 애지중지 살아간다.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생각하지 않는 남편을 보며 뭐든지 버리지 못하고 쟁여뒀던 우리 아빠가 생각나 애달픈 마음이 들다가도 어떨 때는 나도 모르게 쯧쯧 혀를 차기도 하다가 요즘처럼 무분별한 소비가 대세인 시대에 남편 같은 사람도 참 없겠다 싶다.


그런 남편에게 며칠 전 소파를 바꾸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 브라운 색 가죽이 닳아지고 벗겨져 노르스름한 색으로 변모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빈티지스러운 분위기가 나서 오히려 좋았다.

그런데 가죽이 터지면서 얼마 전부터 속에 있는 내용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과 친해지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 남편은 이 소파가 너무 편하고 애정이 간단다.

적어도 1-2년 은 더 쓸 수 있단다.

하긴 이 소파도 우리 집에 왔으니 이렇게 오랜 시간을 버텼을 것이다.

쉽게 싫증내고 버리지 않는 주인 만나 본래의 모습으로 사랑받았다.


그런 남편을 알기에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우리 손을 스쳐갔던 많은 물건들은 오랫동안 대우받으며 제 할 일을 다 마치고 떠나간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그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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