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게으름

별거 없는 하루

by 피노

눈을 돌려 바라본 도로 아래로는 자전거 한대가 환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재빠르게 신호등을 건너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들의 경쾌한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소리,

몇 초, 때론 몇 분마다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떼를 지어 날아가는 v자 형태의 새떼 무리,

어느 집에선가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

침대에 누워 휴일의 평화로운 소리들을 귀에 담으며 스르르 눈을 감는다.

창을 통해 불어오는 살갗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바람은 내가 좋아하는 얇은 인견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게 한다.


일주일 동안의 추석 연휴가 끝나가는 한가로운 어느 날의 오후.

며칠 동안 오락가락하던 빗줄기가 잠시 쉬어가는지 환한 햇살이 방안 가득 들어찼다.

그런 날씨덕에 두꺼운 책 한 권을 펼쳐볼 마음이 생겨났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500페이지가 넘는 책 몇 장을 읽다가 스르르 눈꺼풀이 감겨 침대로 들어갔다.

편안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른함이다.




어린 시절 시골집 나무 마루에 누워서 양철지붕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에 빠져들 때가 생각난다.

'뚜 뚜 뚜 뚜~' 하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다이얼을 돌려 맞춰놓은 오래된 라디오에선 - 지금은 레트로라 불리는- '정오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아나운서 멘트가 흘러나온다.

엄마는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뭔가를 하고 있고 나는 마루에 누워 뒹굴거리며 자꾸만 마음이 근질거린다.

웃음이 나기도 하고, 또 잠깐 슬프기도 하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내 안에서 차오른다.

그것은 행복해서 불안하기도 한 낯선 마음이란 걸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엄마가 있다는 안정감, 파란색 대문 안에 존재하는 내 눈에 익숙한 모든 것들, 화단 한편에 자리 잡은 빨강단풍나뭇잎에 우두둑 떨어지는 빗줄기,

이 모든 것들이 주는 익숙함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거나 변하는 것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행복이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척 조용하게 나를 감싼다는 것을.




현관 앞에 벗어둔 남편의 낡은 슬리퍼를 보며, 그 안에 자리했을 그의 유난히 짧은 새끼발가락을 떠올리다

특별함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익숙해져서 특별함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나를 편안한 삶의 테두리 안에서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그런 것들이 잔잔한 바람이 되어 나의 등 뒤에서 불어준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조금 쉽게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말이다.




베란다에서 바라본 거리는 어느새 발갛게 물이 든 채 어디론가 분주히 향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다.

어스름해진 하늘에 여러 갈래로 나뉜 예쁜 노을길이 생겨났다.

달콤한 게으름은 여전히 나에게 속삭인다 이 날을,

이 시간 속에 틈틈이 자리 잡았던 일상의 평범함을,

그 소중함을 놓치지 말고 기억하라고 나를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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