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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미골 Apr 08. 2023

비밀

슬기로운 농촌생활


 고개를 빼 올려 할머니를 기다리던 자두밭은 꽃향기를 다하였다. 꽃잎이 누렇게 탈색될 즈음엔 산비탈의 조팝나무가 무더기무더기 몸집을 부풀려 하얀 꽃을 피웠다.

 자두밭을 지나 조팝꽃 사이를 오르면 산 중턱에 고사리 군락지가 있다. 사람들은 그런 곳을 고사리밭이라고 부른다.

 봉자네 이웃밭에는 고구마 농사를 짓는 아저씨가 있는데 그의 할아버지 산소 주변이 고사리밭이었다. 며칠 전 고구마 아저씨가 고사리 한 줌 꺾어 내려오다가 봉자를 만나 고사리밭을 가르쳐 주었다. 아저씨가 어렸을 때  엄마와 고사리를 꺾으러 가는 날이면 새벽잠을 설쳐서 지금은 고사리 꼴도 보기 싫다고 했다. 그래서 제사에 쓸 한 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했다.


 고사리밭은 아무에게나 가르쳐 주지 않는다. 돈이 귀한 봄에 고사리는 산골 마을의 큰 소득원이었다. 포도가 주 소득원이 되면서 사람들의 심리도 변했다. 손으로 직접 꺾은 고사리 맛을 고수하거나 농사가 없어 용돈 벌이를 하거나 바지런한 사람이 아니면 고사리 꺾는 일을 큰 노동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산에 고사리가 남아나지는 않았다. 비가 온 뒷날 아침이면 시내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보다 일찍 산을 오른다. 봐 두었던 고사리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본인 물건을 도둑맞은 것처럼 억울 해했다. 봉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낮은 산이라도 혼자 오르지 못하는 봉자는 도식을 졸랐다. 도식은 가지 않겠노라 버티다가 낼 모래 비가 온다고 하니 그때 같이 가겠노라고 했다.


 비는 하루 일찍부터 그다음 날 오후 네 시까지 내렸다. 봉자는 안심하고 하우스에서 포도 순을 땄다. 그 시간에 산에 올 사람을 없을 테니까.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데 낯익은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 소리는 자두밭 쪽으로 사라졌다. 설마 아니겠지. 했는데 한 시간 만에 다시 들린 오토바이 소리의 주인공은 양귀자였다.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도식의 죽마고우이자 팔촌 아재뻘인 조민기의 아내였다. 예감이 불길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귀자의 앞치마 주머니가 임신 팔 개월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귀자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봉자가 일하고 있는 밭 앞을 쌩 지나갔다. 속이 빤히 보였다. 귀자가 그 산을 다닌 지는 올해로 삼 년째다. 뭐 있냐고 물으면 봄이니까 그냥 가본다고만 했다.      


술 좋아하는 귀자 남편은 농막에서 술자리를 자주 갖는데 친한 몇 사람과 늘 함께였다. 그 햇수가 수년이 넘었고 술만 마시는 건 아니었다. 때가 되면 밥도 먹고 고기도 구워 먹었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릴 때도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아무리 농촌이라도 시도 때도 없이 술손님이 오는 것을 좋아할 여자는 없다. 그러나 베알 없는 귀자는 음식이 맛있다, 고맙다는 말만 들으면 지 몸 아까운 줄도 몰랐다. 그런 귀자에게 누군가가 밥 정, 고기정에 술기운이 더해서 고구마 아저씨네 고사리밭을 알려 준 것이다. 혼자만 알고 있으라는 비밀을 전제로. 귀자는 그 비밀을 아주 잘 지켰다. 비밀은 본의 아니게 삼 년 만에 탄로가 났다. 비밀이란 걸 모르는 귀자에게 괘씸죄를 묻고 싶었지만, 품위를 중요시 여기는 봉자는 그럴 수도 없었다.      

안달이 난 봉자는 '자유 이용권' 하나를 면제하는 조건으로 도식을 졸라 산엘 올라갔다.  귀자가 고사리를 꺾은 곳이 다른 곳이길 바라면서.  산기슭엔 오토바이 발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산으로 올라간 장화 발자국도 꾹꾹 찍혀 있었다. 이런 배신감. 봉자는 순간 욱 했다.

‘지가 나랑 어떤 사이고, 응. 계모임이 몇 년 째고, 매번 내 차 타고 다니면서, 나랑 마신 차가 얼마고’       


 산에 왔으니 빈 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산 중턱에 이르자 봉자의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 주먹을 쥔 아기 고사리가 쑥쑥 올라와 있었다. '톡' 꺾이는 소리가 명랑했다. 한 줌이나 꺾었다. 덤으로 취나물도 뜯었다. 산을 오르내리니 운동이 되었고 괘씸한 마음도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고사리밭에는 둥굴레 싹도 많았다. 둥굴레 싹에 나란히 피어 있는 하얀 꽃이 예뻤다. 그사이 도식도 고사리밭 주위를 돌면서 한 줌이나 꺾었다. 이제 막 올라오는 것은 내일 아침이면 적당히 자라 있을 것들이다.    


봉자는 저녁을 먹으면서 내일 아침 다섯 시에 산에 가자고 했다.

 “니가 잘도 일어나겠다.”

 “내일 아침에 고사리 꺾으러 안 가면 배가 아플 것 같은데 어떡하지?”

 “그건 니 욕심이지. ”

 “주인이 허락한 고사리를 같이 꺾자는 게 뭐가 욕심인데? 내 혼자 꺾겠다는 것도 아니고.”

 “너 낼 아침에 일어날 것도 아니잖아? 민기 집사람이 부지런해서 그러는 긴데 뭐가 배가 아프노?”

  “우리 밭 앞을 지나다니면서 말 한마디 안 하는 거 봐. 지하고, 나하고 그런 사이가?”

 “그라지 마라. 부지런한 사람 꺾게 냅 둬라 마. 우리도 꺾었잖아. 그만하믄 안 되나?”

 “알써 낼 아침에 일어나 보고.”     

 귀자 부부는 결혼하고부터 친구이기보다는 팔촌 아재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오는 불편함을 도식도 느꼈지만, 봉자는 수시로 느꼈다. 필요할 땐 친척이고 아닐 땐 남보다 못했다. 옛날엔 한마당에서 팔촌 난다고 했지만, 지금은 결혼도 하는 시대인데 말이다. 배 아파하는 봉자에게 도식이 다시 말했다.

 “괜히 생 배 앓지 말고 하던 대로 해. 낼 하루 품 팔아가 니 다 주께.모자라믄 그걸로 사 먹어라 마.”

 “앗싸! 그러지 뭐.  인성 좋은 내가 아침잠이나 푸욱 자 두지 뭐.”

 사월의 초입, 아침 다섯 시닭도 횟대에 앉아 어슴푸레한 아침을 더듬고 있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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