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일에 대하여
작년 크리스마스이브 날, 강남 압구정에 있는 어느 점집에 가서 사주를 봤다. 1990년 12월 23일, 17시 4분. 물 기운이 많은 사주란다. 깊은 물의 임수를 가진 사람. 맞다. 나는 드넓고 수심 깊은 물처럼 컴컴한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내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 가는 지금, 마치 알몸이 된 기분이다. 그 깊은 물에서 발가벗은 채 나는 헤엄치며,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1990년, 하얀 눈 소복이 내리던 날에 태어났다. 태어난 그날처럼 한결같이 희다는 ‘소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예쁜 뜻과는 달리 다소 중성적인 이름 탓에 어릴 적에는 내 이름은 콤플렉스였다. 늘 남자로 오해받기 십상이었고, 흔하지 않은 성과 특이한 이름 때문에 학교 선생님께서 출석부를 들여다보고 발표시킬 사람을 고를 때면 재수 없게도 꼭 내 이름이 불렸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내 이름이 정말 싫었다. 어느 날 문득 사람의 첫인상은 얼굴의 생김새부터가 아니라 이름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희와 철수보다 흔치 않은 내 이름이 나를 더 특별하게 포장하고, 한결 더 빛나게 해주는 듯했다. 삼십 년 남짓 배소일이라는 이름으로 살다 보니 이제야 내 이름도 정이 간다.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고 했다. 흴 소, 한 일. 흰 도화지 위에 한 획을 긋는다는 이름의 뜻 따라 내 인생에도 한 획을 긋는 ‘소일’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굴곡 없이 자랐다. 교육자 집안에서 K-장녀로서 올곧게 자랐고, 소위 엘리트코스라 일컫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 생명공학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신 아버지의 피가 흘러서인지 뼛속까지 이과생이었다. 그런데 약대생이 되기 위해 3년의 수험생활도 했지만, 번번이 미끄러졌다. 꽤나 유복하다고 믿었던 나에게는 쓰디쓴 실패였다. 하지만 늘 어딘가에는 ‘길’이 있다고 믿으니 어처구니없이 포기가 쉬웠다. 그리고는 친구를 따라 유럽 배낭여행을 훌쩍 떠났다. 세상은 넓었고, 나의 세상은 작았다. 그 넓은 세상 속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우리는 여행에서 운명처럼 만나 연인이 되었고, 부부의 인연으로 평생을 동행하기로 하였다. 역시 어딘가에 나의 길은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늘 말해왔는데, 아빠와 닮은 사람과 정말로 결혼했다. 사람들이 사위를 아들로 착각할 정도로.
스무 살이 되던 해, 뭐에 홀린 듯 장난감 같은 작은 필름카메라를 샀다. 다 큰 애가 십만 원짜리 장난감을 샀다고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매일 그 장난감을 가지고 다녔다. 전공실험 수업에서 실험복 입은 대학동기를 찍어주기도 하고, 남자친구와 데이트할 때도 항상 나의 손에는 그 장난감이 있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나의 시간들을 남겼다. 필름 한 롤에 이 천원 하던 시절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해서 지금은 이 만원이 넘는 필름도 쉽사리 구하기 어렵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사진을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과 장난감 같은 카메라를 조작하는 손맛의 매력에 억척스럽게 비싼 취미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나의 이십 대는 불안했다. 불만족스러웠다. 이십 대의 끝 자락에 다다라서는 뭐가 그리도 불안했는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프랑스 파리에 가서 한량처럼 안식월을 보냈다.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내가 어딜 가든 늘 나의 곁에 머물고 있다. 이 일장춘몽 같던 시간을 물성으로 남기고 싶어서 나의 첫 번째 사진집 <휴식>을 출간했다.
불안했던 이십 대가 지나가고, 평온한 삼십 대를 맞이하고, 서른넷이 되고 나니 왠지 모를 불안이 또 꿈틀거린다. 나의 서른넷은 배 과장, 연구원이라는 한 꺼풀의 껍질을 벗겨내고, 좋아하는 것들과 나를 기록하는 일에 대해 시간을 들인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한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다 보면 불안이 일다가도 나의 서른넷도 깊은 물처럼 고요하게 흘러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