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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소일 Mar 02. 2023

산책(가)자

한강 산책자의 단상, The Flaneur of the Han river

아침이 밝았다. 산책 가자! 힘차게 네 음절을 외치며 오늘도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밥풀은 기다렸다는 듯이 경쾌하게 꼬리를 흔들며 분주히 현관으로 향한다. 나는 대충 눈곱만 떼고 모자를 눌러쓴 채 배변봉투, 물통, 그리고 필름카메라를 챙겨서 산책 나갈 준비를 한다.


나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한강을 산책한다. 양화대교와 한강대교 사이 한강의 북단을 주로 걷는다. 나의 반려견, 밥풀과 함께. 날마다 일 만보에서 이 만보를 걷는다. 사실 산책하러 나가기까지는 달콤한 유혹들이 도사린다. 아침 일찍 일어나기는 했지만 포근한 이불 밖으로 벗어나기가 귀찮고, 고단한 하루를 마친 늦은 저녁에는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넷플릭스를 보며 하루를 편안히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거실 바닥에서 한껏 늘어져 온몸으로 따분하다고 몸짓하는 밥풀을 바라보자니 당장 몸을 일으켜 세워 산책을 하러 나간다. 서로 눈을 맞추고 바보같이 해맑게 웃으며 통통통 걸어가는 밥풀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산책을 게을리할 수가 없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하는 이유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산책의 더 큰 난관이 찾아온다. 특히 여름 장마기간은 최악이다. 나는 원래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 비가 오면 산책의 귀찮음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쓰고 산책을 나가야만 한다. 눈 오는 날은 차라리 낫다. 손발이 꽁꽁 얼 정도로 매서운 추위는 힘들지만, 밥풀은 추위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밝은 표정으로 하아얀 눈밭을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나에게 산책은 숙명이다.


아침 산책은 눈에 초점 없이 좀비처럼 터벅터벅 걷는다. 누가 누구를 산책시키는지 모를 정도로. 그 무의식 속에서 아침 햇살을 느끼고, 새소리에 귀 기울이고, 차가운 아침 공기와 살살 불어오는 강바람을 느끼고, 이어폰에서 랜덤으로 흘러나오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정처 없이 걷는다. 그렇게 걷다 보면, 아침도 꽤나 매력적인 시간이네. 역시 산책하러 나오길 잘했어. 귀찮음이 무색해진다. 아침형 인간은 나와는 거리가 꽤 먼데, 아주 조금은 가까워졌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산책하지만 매일의 나는 다르다. 나의 컨디션도, 생각도, 그리고 그날의 기분도 다르다. 매일의 한강도 다르다. 한강의 사계는 변화한다. 매일마다 산책이 새롭게 느껴진다. 한강의 산책자로서 산책길을 사유하고, 사진으로 기록한다. 매일의 한강을, 밥풀을, 그리고 나를.


평일은 밥풀과 단둘이서 한강을 걷는다. 산책을 하다 보면 조깅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벤치에 앉아 수다 떠는 사람들,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에게서 좋은 기운을 느낀다. 그리고는 홀로 사색에 잠긴다. 주말은 남편과 손 잡고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며, 그 옆에는 두 배로 신난 밥풀과 함께 강변을 걸으면서 소소한 주말을 즐긴다. 셋이서 사이좋게 걷는 이 시간을 위해서 일주일을 기다린다.


한강의 낮은 반짝거리는 윤슬로 가득하여 생기가 넘친다. 한강의 밤은 고요와 정적이 흐르고, 화려한 빛을 내는 건물들과 작은 반딧불이 같은 가로등 불빛 사이로 드넓고 끝없는 어둠이 펼쳐진다. 서울이 이렇게 넓었나 싶다. 한강의 낮과 밤은 두 얼굴을 가진 듯하다.


한강의 봄과 여름은 초록 색깔로 가득하다. 단단한 초록의 힘이 느껴진다.



한강의 가을과 겨울은 색을 잃었다. 힘이 축 쳐져서는 적막과 스산함이 느껴진다. 한강의 사계를 음미한다.


한강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그 많던 서울 사람과 강아지 친구가 모두 사라졌다. 매섭게 추운 날 산책을 하면서 이따금씩 마주치는 강아지와 보호자를 마주칠 때면, 산책의 책임을 다하는 서로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끼며, 무언의 눈짓으로 응원한다. 오늘은 정오 열 두시쯤 한강을 산책했다. 점심 먹고 산책 나온 직장인들과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강아지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한강에도 금세 봄이 오겠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나에게 서울이란 사는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매일 한강을 걷다 보니 이제야 서울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도시에 애정이 간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을 넓은 마당 삼아서 나의 반려견이 신나게 뛰놀며 산책하기를 바란다. 비좁은 도심 속 아파트가 아닌 넓은 마당이 있는 시골집에서 살았다면 지금보다 밥풀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미안함이 항상 마음 한 켠에 자리하며.


밥풀을 만나기 전과 후의 나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밥풀과 함께한 후로 산책과 한강을 더 가까이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일부러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낯선 행복을 찾았다면, 지금은 보통날 함께 한강을 걷는 낯익은 행복의 조각들로 나의 삶을 채운다. 일상은 하염없이 쳇바퀴처럼 굴러간다. 날이 밝고, 눈을 뜨고, 오늘도 쳇바퀴처럼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 오늘도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산책으로 하루를 끝맺는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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