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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소일 Mar 16. 2023

어른의 장난감

(출처: Lomography)

어른이 되고 나서 작은 장난감을 샀다. 초록색 플라스틱 재질에 손바닥만 한 귀여운 장난감이었다. 이 장난감은 로모그래피*에서 나온 토이카메라인데, 이름 그대로 ‘장난감’ 같은 필름카메라다. 필름만 넣으면 사진이 찍힌다는데 빈 깡통처럼 허술한 것이 도대체 어떻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일까. 꼴에 플래시도 달려있군. 갑자기 뭐에 홀렸는지 이 허술한 것을 무려 십만 원이나 주고 샀다. 당시 나의 한 달 용돈은 삼십만 원이었는데 장난감을 사려고 무려 삼분의 일을 써버렸다. 우선 이천 원짜리 필름을 하나 사서 사용설명서에 나와있는 그림대로 필름을 넣었다. 셔터 버튼만 누르면 플래시가 팡 터지면서 알아서 찍히는 일회용 카메라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장난감인 주제에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귀찮게 조작할 것이 많았다. 먼저 피사체가 나로부터 얼마큼 떨어져 있는지부터 계산해야 한다. 아,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 나의 팔 길이는 약 삼십 센티, 키는 일 미터 오십오 센티인 것을 고려하고 대상과 떨어진 거리를 어림잡아서 초점을 맞춘다. 그런 다음 밝은 날은 N, 어두운 밤이면 B모드로 선택해서 조리개를 조절한다. 많이 어두울 때는 미리 플래시 전원을 켠다. 드디어 셔터 버튼을 눌러서 사진을 찍는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상단에 있는 톱니바퀴 같은 것을 돌려서 필름을 감는다.

(*로모그래피: 1992년 비엔나에서 설립된 아날로그 사진전문 회사임. 토이카메라의 대명사로 불리며, LOMO에서 생산된 카메라는 특유의 비네팅과 색감이 특징.)



그 장난감은 애착인형처럼 매일 나와 함께였다. 하지만 점점 욕심이 생겼다. 나의 작은 손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장난감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더 좋은 장난감으로 잘 찍고 싶었다. 나는 회사에 취직해서 첫 월급으로 캐논 디에스엘알을 샀다. 나에게도 큰 장난감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나름 있어 보이는 큰 장난감으로 퀄리티 있는 사진을 찍었지만 아날로그한 필름의 맛이 자꾸 그리워졌다. 결국 수동 필름카메라 중 명기라 불리는 니콘 FM2를 샀다. 또 카메라를 샀다. 회사에 다니면서 주말과 휴가 기간에는 부지런하게 해외여행을 다녔다. 큰 장난감들을 양어깨에 무겁게 짊어지고. 작은 체구의 여자가 씩씩하게 큰 장난감들을 들고 마음 가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이십 대의 패기다. 나를 거쳐간 장난감들 덕분에 나의 이십 대는 안녕했다.



한동안 욕심쟁이처럼 디지털카메라와 필름카메라를 모두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한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고, 또다시 들춰다보는 사진은 늘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이었다. 필름 한롤을 넣으면 딱 서른여섯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카메라로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셔터를 누르다 보니 필름사진 한 장에는 디지털 사진에서는 찾기 어려운 뷰파인더 너머로 애정과 통찰의 시선이 담겨있었다. 아무리 좋은 성능의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 사진은 인스턴트 음식과 같다. 맛도 좋고 먹음직스럽지만 결국 나에겐 영양가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필름 사진은 손으로 짓는 정성스러운 집밥이다. 비록 세련되진 않지만 맛이 깊고 자꾸 손이 간다. 깊은 깨달음을 얻고 휴대폰을 제외한 모든 디지털 카메라를 처분했다.



연애할때 샀던 커플링. 8년째 잘 끼고 있다. 셀프 웨딩스냅도 직접 필름카메라로 찍었다.

그 후로 나는 필름카메라를 억척스럽게 고집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알맹이 큰 다이아반지 대신 나의 로망의 카메라, 라이카 M6를 예물로 받았다.(결혼하고 알게 된 사실인데, 예물로 필름카메라를 받고 싶다고 했을 때 별말씀 없이 사주신 이유는 시아버님께서 젊은 시절 카메라 회사에 다니셨고, 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하실 정도로 사진에 진심이셨다.) 이 카메라는 대대손손 물려줄 것이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 카메라를 손에 들고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을 담고 싶다. 꿈에 그리던 라이카 카메라를 손에 쥐었지만, 비싼 싱글 오리진 원두로 직접 내린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다가도 가끔 달다구리한 싸구려 커피가 생각나 듯 작고 귀여운 그 초록 장난감이 종종 생각이 난다.



사진에는 내가 서려있다. 내가 보인다. 나를 아무리 숨겨도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카메라의 뒤에서 셔터를 누른 내가 드러난다. 아무 이유 없이 찍은 사진은 없다. 사진으로 나를 기록한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평범한 보통날도 한 장의 사진으로 흔적을 남기면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된다. 희미해지는 추억은 사진으로 선과 색이 다시 선명해진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한 장 한 장 남긴다.  우연히 그 초록 장난감을 만나 일종의 표현의 도구로써 나의 삶에 들이게 된 것이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만약 그 장난감을 사지 않았더라면 나는 다른 무언가로 표출하고 있었을까. 이제는 장난감을 손에 들고 있지 않는 내가 상상이 안 간다.



단돈 이천 원이면 필름 한롤을 살 수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필름의 3 대장이던 아그파, 후지, 코닥 필름을 번갈아가면서 돈 걱정 없이 사진을 찍었다. 옛날 옛적에 이야기 같지만 불과 십 년 전이다. 지금은 아그파 필름이 생산 중단되었고, 후지와 코닥 필름은 공급이 줄어들어 미친 듯이 가격이 오르고 있다.(올해도 연이은 코닥의 가격 인상에 눈물이 난다.) 필름 한 롤에 이 만원이 넘어도 필름을 구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지갑을 연다. 눈물을 잠시 훔치면서. 계속 오르는 필름카메라와 필름 값을 충당하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업(業)으로 제대로 해볼까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여 나의 사랑스러운 장난감이 싫증 나버릴 끔찍한 순간을 생각하니 답은 명료하다. 나는 재미있게 장난감을 갖고 노는 마냥 해맑은 아이였으면 한다. 먼 훗날 할머니가 되어서도 단돈 이천 원에 필름을 사서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장난감을 갖고 놀 수 있기를 바란다.



토이카메라로 찍은 우리가족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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