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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은채 Jan 04. 2024

그림보다, 빼곡히 채운 팔레트

유럽 여행 중 스물다섯이 되었습니다

스물다섯 천은채의 첫 글입니다. 스물다섯? 스물다섯이라니... 아직 25라는 나이가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숫자가 싫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스물과 서른의 정중앙에 위치한 나이니까요. 왜인지 완전해 보이는 ‘25’라는 숫자만으로 괜히 안정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뻔한 선곡이지만, 스물다섯이 된 것을 기념하며 새해 첫곡으로는 아이유의 팔레트를 들었습니다. 교환학생을 명목으로 한 여정의 연장선으로,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한 해를 보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요.​

어제 아침 동행인 친구와 프라하 성으로 향하는 길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아이유의 팔레트 어쿠스틱 버전을 들었어요. 원곡에는 없는 ‘달라지지 않아도 투덜대며 사는 게 좋아’, ‘되돌려받기 위한 친절은 그만둘까봐’라는 가사가 마음에 들어 공개 당시 무척이나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방금 언급한 것들 외에도 이 노래에 구석구석 자리잡은 가사들을 좋아하지만, 이번엔 오랜만에 들린 ‘그림보다 빼곡히 채운 팔레트’라는 가사에 마음이 가더라고요. 이 노래에 해당 가사가 있다는 사실을 꽤나 오래 잊고 살았는데, 문득 들려온 노랫말에 울컥하는 것을 보면 노래의 제목이 괜히 ‘팔레트’인 것이 아닌가 봅니다.

얼마 전 파리에 갔을 때 오르세 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 특별전을 관람했습니다. 고흐의 여러 그림들 사이 그가 사용했던 팔레트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는데, 오늘의 블로그 글 제목에도 적은 아이유의 ‘팔레트’ 속 가사를 듣자마자 고흐의 팔레트가 떠올랐습니다. 완성된 그림의 형태가 아니지만, 물감으로 빼곡히 채워진 모습만으로 특별전에 전시된 여느 그림들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그의 팔레트가요.


2023년의 절반을 유럽에서 보내며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생이라는 게 꼭 대단한 성취들로 이루어진 완성작일 필요가 없구나 하는 것입니다. 한 해가 끝나갈 때쯤 무언가가 되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여러 색의 물감으로 가득한 팔레트처럼, 각 칸에 적당한 색을 채워넣기만 하면 그것 자체로 가치있는 삶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설령 겉보기엔 제각각인 색들의 부조화가 아름답지 않게 느껴지더라도요.

스물다섯 천은채는 2024년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요? 유럽에서 몇 개월을 보내며 정리된 생각과 차분해진 마음을 한국에 돌아가서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을지, 상념이 깨끗이 비워진 채로 정갈해진 정신을 얼마나 오래 지속시킬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두렵기도 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을 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며 한 다짐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남들에게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겠다!’ 하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던 지난 몇 년간의 포부와는 달리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다는 점입니다. 타인의 평가가 여전히 제게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영향이 삶의 근간을 흔들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사실 또한 깨달아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각자의 2023년이 어땠든,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열었든 간에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보내시길.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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