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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Nov 24. 2023

창세기, 우주, 인간, 세계관

인간은 어떻게 우주의 창조에 참여하는가?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주와 인간 


신은 말씀으로 세계를 만들었다. 빛에서 시작해, 하늘과 땅과 바다, 각종 생명체,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다. 하지만 본질은 말씀이 아니다. 말의 근원은 생각이며, 생각은 개념의 조합에서 나온다. 신은 정신의 상태 (Spirit of God)에서 우주와 사물에 대한 개념을 설계하고, 이 것을 구체화하려는 의지를 품어서 말씀으로 전달한 것이다. 누가 그 말씀을 받아들였나? 우주가 그 말을 들었다. 대부분의 피조물은 우주를 통해 간접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주는 말씀을 통하지 않고 신이 손수 만든 첫 번째 창조물이다. 


우주는 모든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 그 자체이며 사물이 작용하는 세계관의 기반이다. 우주는 신의 의지에 충성하며, 말씀으로 전달받은 그대로 모든 것을 만들어주었다. 이를 우주가 창조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설계도는 신에게서 받은 것이다. 신이 우주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중요하다. 신의 정신을 우주에게 나누어 주었기에 우주에게 지성이 생긴 것이다.


한편 인간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인간 또한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최초의 창조물 우주를 직접 빚어냈듯이, 마지막 창조물 인간도 직접 빚어내었다. 자신의 형상을 모델로 삼아 철저하게 설계하여 많은 공을 들여 창조했다. 게다가 최종적으로는 숨(생기)을 불어넣어줌으로써 자신이 가진 '중요한 것', 아마도 정신의 일부를 나누어주었다. 우주와 인간은 거의 동등한 개념적 가치를 부여해 만들었다고 임의로 해석해 볼 수 있을까? 그 이상이다. 인간이 아예 우주를 다스려도 된다고 선포해 버렸다. 



공간의 물리학


빛이라는 존재의 시각적 충격 때문인지 신의 첫 창조물은 빛으로 오인되곤 한다. 그러나 빛이 존재하기 위해선 그것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빛이 없는 어둠의 세상이라고 무(無)의 상태는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없었을 뿐, 이미 세계를 구성할 질료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공간, 그 물리적 작용, 이를 창조하는 것이 우선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짧은 최초의 한 마디로 너무 간단하게 서술했을 뿐이다. 


공간이란 반드시 물질과 동시에 탄생한다.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창조의 순서는 이 자명한 사실을 충실하게 제시한다. 물리학적으로 빅뱅 이론을 대입해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주 최초의 한 점, 이 점이 확장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아는 공간이란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점은 거대한 에너지다. 점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바깥은 공간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에너지가 없는 바깥은 질량도 중력파도 없으므로 공간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중력파는 질량체와 함께 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공간과 시간이란 개념은 점이 확장하는 순간부터 성립한다. 


아직 공간을 이루기 전 한 점의 세상에서 신은 형태 없이 어떻게 존재했을까? 상상의 단서는 다음 2절 문장에 있다. 아직은 형태가 모호한 땅과 물 사이로, 신의 정신(the Spirit of God)이 어두운 물 위를 유영하고 있다고 한다. 즉, 그 직전까지 신은 형체가 없는 어떤 정신의 상태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리적 세계가 탄생하기 전에 무형의 정신적 세계가 먼저 다른 차원에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정신의 세계 속에서 하늘과 땅이라는 물리적 개념을 구상되었고, 신의 말씀은 공간과 사물을 실체화시켰다. 점이 처음으로 확장하는 순간은 완벽한 관념론의 세계다. 신의 정신 속에 하나의 개념이 잡히면 그것이 현실에서 곧바로 실체가 되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사물의 개념적인 속성과 물리적인 속성의 경계가 모호했기에 혼돈과 공허(without form and void) 속의 세계이기도 했다.



개념과 실체화


모든 창조는 개념에서 시작한다. 최초의 창조물인 공간도 개념에서 시작한다. 공간이란 사물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어떤 텅 빈자리이다. 그 공간의 크기는 아마도 신의 정신의 크기만큼 무한할 것이다. 공간이 없는 진정한 무의 세계는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가 공간이란 개념 내에 종속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조물주의 입장에서 공간은 곧 이어질 창조를 위한 세계의 기본(default) 값이며, 궁극적으로 마지막 창조물인 인간으로 향하는 과정의 시작이다. 인간은 공간을 먼저 만들어야 존재할 수 있다.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첫 번째로 할 것은 그 원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세계, 그 세계의 개념을 구상하는 것이다.


신은 하루라는 개념을 세웠다. 하루를 구성하는 것은 낮과 밤이다. 낮은 밝고 밤은 어둡다. 빛은 밝음을 위해, 또한 반대로 빛이 없는 어둠을 위해 창조되었다. 원하는 개념을 위해 새로운 개념을 설계 했다. 이로써 신은 하루를 만들어냈고 생명체들에게 낮과 밤을 보낼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규칙적인 빛의 운행을 위해 광명체도 구상해 실체화했다. 신의 정신 속의 있는 개념이 창조를 선도했다. 신은 이 모든 창조물을 인간에게 맡기고서, 자신의 가장 큰 능력이자 근본이 되는 정신까지 나누어줬다. 인간에게 정신이 있다는 것은, 개념을 통해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실체화할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좀 더 광역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인간에게는 아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능력까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인간의 창조


좋은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 속 세계에 푹 빠져서, 마치 그 세계의 주인공이 된 듯한 심정이 된다. 주요 인물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나의 감각으로 느끼는 듯 동조하게 된다. 소설 속 세계가 품고 있는 전반적인 체계를 세계관이라고 한다. 작가는 한 번 세계관을 구상했다고 스토리를 이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세계에 완전히 몰입하여 상상을 이어가야만 합당한 스토리가 완성될 수 있다. 세계관은 어떤 세계의 성격을 규정하지만 이는 마치 그 세계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권선징악은 흔히 쓰이는 세계관인데, 이런 세계관 속에선 얼핏 주인공이 세계의 무심함에도 불구하고 선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 같지만, 실지로는 권선징악이란 가치의 실현을 위해 선을 반드시 실현할 의지를 세계가 주인공에게 심어주고 있다. 가장 강한 의지를 가진 쪽은 세계이다. 그 의지가 스토리를 이어가게 해 준다. 


현실의 세계에서도 세계관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할까? 세계의 물리적인 법칙에 유연한 세계관이 적용될 수 있다 하면 비약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자들과 시인들과 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각자 고민하여 "이 세계의 성격은 이러하다." 하며 제시할 때, 이들의 결론은 단지 현상에 대한 관찰을 제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이 규정한 세계의 성격을 따라 세계 자체가 영향을 받고 바뀌게 된다. 이 세계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다윈이 주장하고 온 세계의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동조하며 이 말을 의식과 무의식에 새겨놓을 때, 이 세계관은 훗날 우생학을 거쳐, 세계전쟁과 대량학살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과학적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창조된 개념이 세계관으로 확장될 때, 세계는 그 개념을 현실로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신이 인간에게 맡겨놓은 창조 능력이다. 


스스로 생각해서 믿게 된 것은 세계, 곧 우주에 그대로 주입된다. 우주는 그 생각, 개념에 걸맞은 현실 상황을 끄집어낸다.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 세계가 그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사람만 내어주지 않는다. 적어도 그의 시선에서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된다. 또한 피해의식으로 가득한 사람에게 세계는 오직 고통만을 내어준다. 그 자신이 불러온 불행이다. 이런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강력한 소망, 강력한 예상들이 항상 그대로 실현되지 않던데 현실을 무시한 비약은 아닌가? 신이 인간을 만들기 전에 우주를 먼저 만들었던 것을 기억해 보자. 그 소망, 그 예상이 이루어지기 바란다면 그게 가능한 세계관을 먼저 세우는 게 맞지 않을까? 엄청난 돈을 벌고 싶다면 무한한 돈이 자신을 가치 있게 써줄 사람을 찾아 흘러 다니는 세계관이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 엄청난 사랑을 받고 싶다면 사랑이 사랑으로 보답받는 세계가 눈으로도 보여야 한다. 그 개념을 진심으로 믿는 것이다. 개념은 주입이 아닌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세심한 고민 속에서 작위적이지 않게 우리는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하고 현실로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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