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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퍼레논 Jun 03. 2024

재미있는 일본의 邦題의 세계

6,70년대 일본에는 현대의 사람들이 본다면 참 재미있는 문화가 하나 있었다. 바로 제목에도 언급한 邦題(ほうだい 호우다이)라는 문화이다. 한국어로는 딱히 1대 1로 통하는 단어가 없지만 쉽게 말하면 영미권 영화나 음악의 타이틀을 일본어로 현지화하는 것이다.


20대 시절 약 1년간 일본으로 유학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음악이라면 사족을 못쓸 때였고 아는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일본은 음악애호가, 음반 수집가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다. 아직도 곳곳에 대형음반점과 중고 CD와 레코드 가게들이 많이 존재한다. 중고 레코드를 주로 취급하는 전국 규모의 거대 체인도 존재하기에 체계화도 잘 되어있다. 처음 일본의 큰 레코드점에 갔을 때 가장 생소했던 게 바로 OBI였다. 오비란 일본의 기모노를 입을 때 허리에 매는 허리띠를 뜻한다. 일본산 LP나 CD에는 광고문구나 현지화 앨범명 등을 적어 넣은 띠지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따와서 이를 오비라고 부른다.

오비의 예시. 큰글씨로 비틀즈 러버소울이라 적혀있다.

이는 전 세계 공통으로 미국이나 영국에서 발매된 앨범에 이러한 띠지가 삽입되어도 영어권에서도 OBI라고 표기한다. 이러한 오비문화는 광고의 목적도 있지만 먼 과거, 비영어권 국가인 일본에서 긴 영어 단어로 이루어진 타이틀이 많다 보니 새로운 음반을 발매하면 효과적으로 이를 홍보하기 위해서 일본어 표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오비와 현지화 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 현지화 앨범명에는 크게 3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직관형으로 말 그대로 보이는 대로 일본어 표기를 하는 부류가 있고 두 번째로는 안드로메다형 이 있는데 전혀 인과관계를 알 수가 없는 의미불명의 황당한 제목을 뜻한다. 그리고 세 번째 초월번역형이다. 앨범의 분위기와 주제를 잘 반영한 명 작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럼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다.


1. Sex Pistols -

Never Mind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1977)

일본어 현지화 : 勝手にしやがれ (니 멋대로 해라)

유형 3

섹스 피스톨즈의 데뷔작이자 유일작이자 펑크 역사의 걸작 Never Mind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이 영문 원제 또한 상당히 펑크적으로 막 나가는 제목인데 Bollock이 남성의 고환을 속 된 말로 부르는 말이니 원제는 “X 까고 신경 쓰지 마 여기 섹스 피스톨즈가 있다” 정도 되겠다. 일본어 현지화는 勝手にしやがれ가 되었는데 니 맘대로 해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만 표준어라기보다 매우 강한 어조로 “니 마음대로 쳐해라” 가 더 올바른 번역일 것이다. 펑크와 섹스 피스톨즈의 정신을 잘 표현한 초월 현지명 중 하나.


2. The Doors - The Doors (1967)

일본어 현지화 : ハートに火をつけて (하트[마음]에 불을 지펴줘)

유형 3

원제는 밴드명인 셀프 타이틀 The Doors이지만 일본에서는 하트에 불을 지펴줘라는 타이틀로 발표되었다. 사실 앨범의 대표곡이자 사이키델릭 시대의 클래식 Light My Fire의 현지명 역시 하트에 불을 지펴줘이다. 앨범 발매 이전 이미 일본에서도 싱글로 미리 하트에 불을 지펴줘라는 타이틀로 발표되어 큰 인기를 구가했다고. 하트에 불을 지펴달라는 로맨틱하고 시적인 표현이 멋진 현지화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3. Pink Floyd -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일본어 현지화 : 狂気(광기)

유형 3

핑크 플로이드의 걸작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현지화명은 간결하고 강렬하게 狂気(광기)이다. 현대인들에게 광기를 일으키는 여러 요소들을 탐구하고 있는 앨범의 내용과 취지에 잘 부합하는 작명이라 생각한다. 앨범의 배급사에서도 단순히 수입해서 공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앨범의 내용과 아티스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중에게 제대로 각인시키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


4. Genesis - Nursery Cryme (1971)

일본어 현지화 : 怪奇骨董音楽箱 (괴기골동음악상자)

유형 2,3 복합형

슬슬 황당한 타이틀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거장 제네시스의 명작 Nursery Cryme은 일본에서는 怪奇骨董音楽箱(괴기골동음악상자)로 불린다. 엥? 뜬금없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앨범의 원제와 몇 광년은 먼 제목으로 보이지만, 사실 앨범의 주요 곡이자 대표곡인 첫곡 “The Musical Box"와 연관이 있는 제목이다. 이 곡은 중세 빅토리아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곡인데 앨범커버에 등장하는 크리켓 배트를 들고 스윙하는 듯한 여성이 실수로 죽인 남성의 목을 오르골 안에 숨기고 매일밤 그 오르골에서 이 여성에게 구애를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괴상한 기담을 노래하는 곡이다. 곡의 내용을 알고 나니 어떤가? 처음 보았을 때는 정신이 아득해질 수 있는 괴상한 제목으로 느껴지지만 첫 곡을 듣고 나서 다시 보면 상당히 고풍스럽고 분위기와 내용을 잘 반영한 제목으로 보이지 않는가?


5. Iggy And The Stooges -

Raw Power (1973)

일본어 현지화 : 淫力魔人(음력마인....)

유형 2

오늘날의 펑크가 존재하게 만든 작품들 중 하나인 Iggy and The Stooges의 명작 Raw Power의 일본현지화 제목은 淫力魔人(음력마인)이다. 첫 글자 淫은 음란할 음 자이다. 앨범명은 음란한 마인이라는 뜻이 된다. 흠..... 실로 정신이 살짝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것 같은 제목이다. 이 글을 적으면서 이 앨범의 제목이 왜 음력마인이 되었는지 찾아보았는데 현지의 음악팬들 역시 유래를 알 수없다고 한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작명으로 일본 내에서도 유명한 듯하다.


6. Tyrannosaurus Rex -

My People Were Fair And Had Sky In Their Hair... But Now They're Content To Wear Stars On Their Brows (1968)

일본어 현지화 : ティラノザウルス・レックス登場!!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등장!! )

유형 2

수입사가 앨범명이 너무 길어서 해석하기 귀찮았나 보다.


7. The Beatles - A Hard Day's Night (1964)

일본어 현지화 : ビートルズがやって来る ヤア! ヤア! ヤア! (비틀즈가 온다 야! 야! 야!)

유형 2

비틀즈의 초기명반 A Hard Day's Night는 일본에서 ビートルズがやって来る ヤァ! ヤァ! ヤァ! (비틀즈가 온다 야! 야! 야!)이다. 이건 또 뭔가 싶다. 초기 비틀즈는 두 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A Hard Day's Night는 비틀즈가 출연한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겸하는 앨범이고 일본의 현지화 타이틀은 일본에서 영화개봉당시 영화의 타이틀이었다. 영화는 비틀즈 멤버들이 스타덤에 이른 이후 팬들과 매스컴을 피해 좌충우돌하는 내용을 담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이다. 아마도 영화의 유쾌한 분위기와 당시 비틀즈의 아이돌

스러운 톡톡 튀는 에너지를 표현한 현지화 타이틀인 듯 싶은데 그래도 좀 아스트랄 하긴 하다.


8. Jeff Beck - Blow By Blow (1975)

일본어 현지화 : ギター殺人者の凱旋 (기타 살인자의 개선)

유형 2

제프 벡의 재즈 퓨전 기타 인스트루멘트의 걸작 Blow By Blow의 현지화명은 ギター殺人者の凱旋(기타 살인자의 개선)이다. 이건 또 뭔가 싶은 제목이 나왔다. 처음 봤을 때 머릿속에 물음표밖에 안 떠오를 정도로 황당했었던 기억이 있다. 무슨 헤비메탈 앨범의 제목 같지만 정작 앨범은 보컬이 없는 순수 인스트루멘탈 앨범에 재즈퓨전 스타일의 펑키하고 스무스한 음악들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앨범에는 ”살인자“ 도 ”개선“도 없다. 그래서 왜 이러한 타이틀이 붙었는지 알아보니 놀랍게도 이는 영국에서 먼저 홍보문구로서 쓰인 것을 일본어로 직역한 문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이 앨범의 홍보문구로서 The Return of The Axe Murderer 가 쓰였는데 이는 직전까지 그가 활동하던 트리오 Beck Bogett & Appice를 해산한 후 그가 다시 솔로 아티스트로 돌아왔다는 의미와 영미권에서 기타의 생김새를 빗대어 도끼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점, 끝내주는 음악이나 연주자를 Killer Tune 혹은 Guitar Murderer라고 감탄사 섞인 표현을 많이 했다는 점 등에 착안한 홍보문구라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이 홍보문구를 그대로 직역하여 이런 제목이 만들어졌다고.


9. Frank Zappa -

The Man From Utopia (1983)

일본어 현지화 : ハエハエカカカザッパッパ! (하에하에 카카카 자팟파!)

유형 2

프랭크 자파의 1983년 앨범 The Man From Utopia는 일본에서는 ハエハエカカカザッパッパ!(하에 하에 카카카 자팟파!)이다...... 아니 이건 또 뭔가 싶다. 이번에 선정한 앨범들 중에서도 가장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는 아스트랄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건 도대체 왜 이런 제목이 되었나 알아보았다. 정말 어이없지만 인과관계 따위는 없었고 그저 당시 일본에 ハエハエカカカキンチョール(하에하에 카카카 킨철)이라는 이름의 살충제와 그 광고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어서 그냥 저렇게 지었다고 한다. 작명한 이유도 안드로메다 그 자체.


10. AC/DC -

If You Want Blood, You've Got It (1978)

일본어 현지화 : ギター殺人事件(기타살인사건)

유형 1

직관형 그 자체. AC/DC의 본 스콧 시절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라이브 앨범 If You Want Blood, You've Got It은 일본에서는 커버를 보고 바로 지은듯한 이름 “ギター殺人事件 (기타살인사건)” 으로 통한다. 흠... 그렇구만. 커버아트가 그냥 그대로여서 뭐 사족을 달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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