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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퍼레논 Jul 02. 2024

The Foundation of Stones 1

간과된 천재 브라이언 존스 Tribute 1

어쩔 수 없이 롤링 스톤즈의 전성기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이다. 이 시기 나온 작품들만 Beggars Banquet (1968), Let It Bleed (1969), Sticky Fingers (1971), Exile On Main St. (1972) 그저 눈이 부신 걸작들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초기 리더인 브라이언 존스가 있던 시기의 음악과 앨범들은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 수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Out of Our Head (1965) 나 Paint It Black이 있다는 이유로 Aftermath(1966) 만이 약간의 주목을 받을 뿐이다.

Brian Jones

롤링 스톤즈의 초기 리더는 명백히 브라이언 존스였다. 그는 천재로 여겨지던 아티스트들이 천재라고 인식하는 아티스트였다. 그리고 수많은 밴드들이 탐내는 인재이기도 했다. 롤링 스톤즈의 음악이 당대의 브리티시 인베이젼 밴드들 사이에서, 영국의 밴드씬에서 확연히 차별점을 가지는 이유는 대부분 브라이언 존스 덕분이다. 사실 1960년대 초반 영국의 밴드의 연주자들은 아마추어리즘이 묻어나는 연주자들이 대부분이 상황이었다. 1950년대 중반 경 유행하던 스키플 밴드 (전통적인 악기가 아니라 빨래판, 드럼통, 구둣주걱 등 일상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로 리듬파트를 구성하고 어쿠스틱 기타나 벤조 등의 간소한 멜로디 악기로 구성된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음악. 4,50년대 포크와 블루스 음악에 큰 영향을 받았다.) 들이 1950년대 후반 불어닥친 로큰롤 열풍에 경도되어 록밴드로 발전한 밴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브라이언 존스의 존재는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브라이언 존스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던 부모님 덕분에 피아노를 시작으로 여러 악기들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음악을 제대로 배웠거나 고등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 접한 음악과 악기연주는 계기였을 뿐, 천부적인 음악적 센스와 재능을 발휘하여 악기를 스스로 접하며 독학으로 여러 악기들을 마스터해나가기 시작했다.

The Multi Instrumetalist

그는 초기 록 여명기의 대표적인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Multi Instrumetalist 다중연주자, 멀티 연주자)이다.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는 단순히 “연주할 줄 안다” 수준으로는 얻을 수 없는 칭호이다. 다룰 수 있는 악기들의 연주 레벨이 라이브 공연과 레코딩에서도 적용 가능한 레벨이 되어야 멀티 연주자로 불린다. 그는 실로 20가지가 넘는 악기를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의 레벨로 다룰 수 있었다. 메인파트는 기타리스트였기 때문에 기타는 물론 어쿠스틱 기타와 베이스 기타 전반, 하모니카와 피아노, 시타르와 타블라 같은 인도악기, 멜로트론과 오르간 같은 일렉트릭 건반, 마림바, 팀파니 같은 클래시컬 타악기, 또한 덜시머, 색소폰, 플루트, 아코디언, 만돌린, 오보에, 클라리넷 등 당대의 대중음악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악기들을 연주했다. 이 모두는 브라이언 존스가 스톤즈 앨범에서 직접 연주해 냈다. 스키플에서 록 밴드로 전환한 밴드들이 지천인 음악씬에서 스톤즈의 음악은 브라이언 존스의 존재로 인해 차별화될 수있었다.


브라이언 존스 시대의 앨범들 중 데뷔작 The Rolling Stones (1964), 두 번째 앨범 The Rolling Stones No.2 (1965), 세 번째 앨범 Out of Our Heads (1965) 은 브라이언의 주도로 얼리 블루스와 믹과 키스의 취향이 반영된 로큰롤 커버곡들이 가득한 초기작들이다. 오리지널 보단 커버곡들이 주로 담겨있는데, 이는 브라이언 존스의 프로덕션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이다. 초기 비틀즈의 방향성을 그들의 매니저 브라이언 앱스타인이 결정했듯이 롤링 스톤즈의 매니저 앤드류 루그 올드햄의 방침은 스톤즈를 비틀즈의 라이벌로서 키워낼 비전을 가지고 자작곡을 만드는 방침으로 밴드를 이끌려했다, 반면 리더인 브라이언의 마인드는 “블루스 역사에 위대한 명곡들이 즐비한데 어째서 자작곡을 만들어야 하지?” 였다. 위대한 블루스 넘버를 훌륭하게 어레인지 하는 것. 이것이 브라이언 존스의 신념이었다.

매니저와 리더

그의 신념은 단순히 재거 - 리차즈 콤비처럼 작곡의 능력이 떨어진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의 블루스 사랑과 루츠는 매우 뿌리 깊고 순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자작곡 기피는 블루스 음악의 역사와 거장들의 음악에 대한 큰 경외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신념은 금전적 성공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초기 스톤즈는 압도적인 음악적 센스와 다중악기연주자의 능력을 가진 브라이언의 주도하에 움직였지만, 1965년 재거 - 리차즈 콤비는 게임 체인저를 만들어내며 밴드 내 파워 밸런스를 점점 브라이언에서 재거 - 리차즈 콤비에게로 가져오게 된다. 그 게임 체인저가 바로 역사적인 명곡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었다. 재거 - 리차즈 콤비의 자작곡인 이 곡은 기어코 빌보드 정상을 거머쥐고 만다. 브라이언 시대의 곡들로는 이루지 못한 쾌거였다. 기세를 이어 밴드는 이듬해 완벽히 재거 - 리차즈 체제의 승전보를 울리게 되는 걸작 Aftermath(1966)를 발표한다. 앨범은 새티스팩션의 성공으로 가능성을 타진한 밴드가 전곡 재거 - 리차즈의 자작곡으로 채워 넣은 스톤즈 최초의 작가주의적 걸작이었다.

Aftermath(1966)

또 다른 영미싱글차트 넘버원 Paint It Black을 발표하며 기세를 이어가면서도, 앨범 역시 그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영국앨범차트 1위,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2위를 기록하며 재거 - 리차즈는 밴드 내의 주도권 경쟁에서 브라이언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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