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리 오래 전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SNS계정을 알려달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SNS 안 합니다”라고 대답하자 돌아온 대답은 뭔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과 “왜죠?”라는 물음이었다. 그때 느꼈다. SNS가 얼마나 현대인들의 삶에 깊이 녹아들어 있는지,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이 SNS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사실 나도 약 1년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해 왔다. 많진 않지만 약 천명 남짓의 팔로워도 보유하고 있었고 LP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비슷한 취향을 가진 다양한 성별,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다양한 장르의 LP들의 플레이 영상을 올리며 앨범에 대한,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운영했었다. 하지만 1년 전쯤 딱 계정을 없애버렸다. 미련 없이.
나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하는 독서광이었다. 소설, 에세이, 고전, 현대문학을 막론하고 책을 읽었다. 우주와 과학에도 관심이 많아 전문서적 또한 애독서였다. 물론 나이에 맞게 만화도 열심히 읽었고, 고등학생 때는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소설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무튼 장르를 떠나 그만큼 읽는다는 행위를 좋아했다. 하지만 십수 년을 독서에 빠져 살던 나도 현대문명의 이기라 할 수 있는 SNS와 유튜브, OTT 서비스를 자연스럽게 접하며 그에 젖어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니 6개월 넘게 책 한 권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자체가 충격이었다기 보단 내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독서라는 취미를 6개월 동안 하지 않았다는 것에 아무런 자각이 없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현대 디지털 문물이 얼마나 사람을 무지각하게 만드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난 음악을 좋아한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프로그레시브 록, 사이키델릭 록, 블루스 록이다. 전부 복잡한 구성의 긴 연주시간이나 이모셔널 한 긴 솔로잉이 특징인 장르이다. 어느 날, 참 좋아하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유명한 곡인 Jethro Tull의 Thick as A Brick을 들었다. 이 곡은 두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어서 첫 파트가 22분, 두 번째 파트가 21분 정도 되는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의 대표적인 대곡이다. 여하튼 오랫동안 좋아하며 수백 번은 들었을 이 곡을 듣고 기억이 나는 부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 대곡은 곡에 집중하여 진행을 따라가며 감상해야 하는데 중간중간 집중이 뚝뚝 끊기니 전체적인 곡의 상이 떠오르지가 않는 것이다.
내가 짧지만 평생을 들여 사랑해 온 독서와 음악을 즐길 수 없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그런 의문을 가지던 중, TV 뉴스에서 SNS와 유튜브의 숏 폼 동영상과 OTT 서비스의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현대인의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되었다. 도파민 분비에 관한 내용이었다. 원래 도파민은 뇌에서 기쁨이나 행복을 느낄 때, 운동이나 스포츠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했을 때, 예술작품을 감상하거나 공들여 한 권의 좋은 책을 읽었을 때 등과 같이 무언가 노력을 하여 이루어 낸 것에 대한 보상으로 서 뇌에서 분비하는 물질이다. 하지만 강한 시각적 자극이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스토리텔링의 영상물을 통해 노력 없이 도파민을 인위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고, 현대의 SNS 게시물이나 숏 폼 동영상, 자극적인 내용의 OTT 서비스의 콘텐츠는 그것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다.
뉴스를 보고 생각했다. 현대인들 중 과연 OTT 서비스와 SNS를 구독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시간에 책 한 권을 잡고 읽거나 앨범 한 장을 진득하니 감상하는 사람들 중 어느 쪽이 많을까? 당연히 전자임에 분명하다. 분명 세계는 지금 SNS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있다. 게시물과 동영상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소비하며 댓글이나 실시간 방송 등으로 소통할 수 있다. 모두가 SNS와 디지털로 연결된 지금 같은 시대에 책 한 권, 앨범 한 장 진득하니 들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니 그런 생각조차 안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소위 말하는 디지털 디톡스에 들어갔다. 약 1년 전부터 SNS계정을 없애고 인스타그램 어플을 지웠다. 유튜브도 쇼츠는 안 보려고 노력하고 자극적인 콘텐츠나 재미 위주의 영상보다는 내 취미취향에 맞추어 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했더니 유튜브에 접속하는 빈도와 시간 자체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내는 돈에 비해 자주 보지도 않던 OTT서비스는 아예 전부 구독해지 해버렸다. 해지하고 생각해 보니 OTT 구독이란 게 보는 시간과 빈도에 비해 대부분 가격이 비싸고 자동결제가 기본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잘 보지도 않으면서 꾸역꾸역 구독만 이어가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서운 마케팅이다. 이렇게 정리하자 독서와 음악이 다시 삶으로 자연스럽게 돌... 아왔다면 좋겠지만 한번 도파민에 빼앗긴 집중력을 되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전히 책 한 권 읽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리고 힘들까 싶었고, 길고 복잡한 프로그레시브 록이나 재즈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꾸준히 노력했다. 내가 좋아하던 것을 내 삶에 다시 녹여내기 위한 인내의 시간이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OTT는 보지 않는다. 유튜브도 많이, 생각 없이 보지 않는다. SNS 역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음악의 아름다움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이 선택을 후회하냐고 물어본다면 조금의 후회와 큰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하리라. SNS와 유튜브로 많은 현대인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 안에서 유행과 이 시대의 여론과 이데올로기가 탄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소셜미디어를 멀리하는 인간은 유행에 뒤처질 수밖에 없고, 대세 여론에 늦게(그래봐야 조금. 소셜미디어 말고도 인터넷 뉴스나 TV뉴스로도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다.) 반응할 수밖에 없다. 디메리트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유행에 죽자고 매달려야 할 나이가 한참 지났고, 유행이나 화젯거리 따위에 휘둘리기보다 나의 취향과 내가 사랑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나이인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나 역시 이 시대에 10대나 20대로 살아가야 했다면 선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이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면서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 서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시 즐겁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의 후회와 큰 만족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