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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멋지기 Jan 15. 2024

겨울의 입술, 겨울의 몸

일상기록 단수필


흔히 우리는 사계절을 영위하며 산다고 합니다. 말인즉슨 사계절이 한 해에 걸쳐 펼쳐지고 그중 겨울은 주로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가 됩니다. 여러 기후변화 문제 때문에 과거만큼 빈틈없이 정확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겨울이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것이 꼭 달력에 박힌 12라는 숫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기 속 수분이 점차 사라지고 기온이 내려가면서 시원했던 바람이 점차 피부를 할퀴는 듯 사나워지면 가장 먼저 징조를 보이는 것은 입술입니다. 처음에는 겨울밤 베란다에 말려둔 귤껍질처럼 바싹 마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일은 더 심각해집니다. 마치 입에 나무껍질을 물고 있는 것처럼 퍼석하게 입술이 다 갈라지기 때문이죠. 메말라가는 입술을 탐하는 혓바닥의 은근한 놀림에 깜짝 놀랄 때 겨울이 왔음을 느낍니다. 

안온한 내 방 침대에 누워 쉴 때도 차이점을 느낍니다.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워 있으면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 되곤 합니다만 갑작스레 등과 팔과 다리가 간지러울 때가 있습니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말이죠. 등에는 눈이 닿을 수 없으니 방금 긁은 팔과 다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느낄새도 없이 건조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립밤 바르는 것을 깜빡한 하루 끝에 매달린 입술과 다르지 않게 퍽퍽하니 수분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바디로션을 발라야 하고 틈틈이 립밤을 바르는 것이 귀찮을 때 역시 겨울이 왔음을 느낍니다. 

기후 변화의 여파를 작년 말에 유독 더 체감한 것 같습니다. 12월이 됐음에도 어안이 벙벙할 만큼 날씨가 춥지 않아서, 춥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늦가을처럼 더워서, 립밤은 서랍 어딘가에 유폐를 해 둔 채 그 사실을 잊고 있었고 바디 로션 또한 눈에 보이는 곳에 있지만 손도 대지 않았었죠. 그러다 갑작스레 비도 왔고요, 그러다가 갑자기 추워졌다가 눈이 왔다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세밑이 돼서야 찾아온 한파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다니다 새해를 맞았네요. 

종잡을 수 없는 날씨에 관심과 외면 사이를 바쁘게 오가야 했던 바디로션과 립밤이 안쓰럽게 느껴졌더랬습니다. 수치상으로 얼마나 차이가 나길래 이럴까 싶기도 해서 일기예보를 쭉 찾아봤습니다. 평균을 내보니 기온차의 폭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고작 몇 도였죠. 그 작은 차이에 내 몸이 이리도 큰 자극을 받는지 잠시 헛웃음을 내뱉었습니다. 동시에 관심과 무관심의 수혜자이자 피해자로 겨우내 살아가는 바디로션과 립밤이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겨울이 끝나면 다시 겨울이 오기까지 세 번의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저들은 철저하게 제 기억에서 지워진다는 점이죠. 그 사이에 유통기한이라도 지나면 버림받게 되고 크기까지 작은 립밤은 잃어버리기 일쑤여서 겨울만 되면 새로 사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바디로션과 립밤은 단 한 번도 끝까지 다 써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지금 쓰는 바디로션은 바닥이 어설프게나마 보일 정도로 사용하긴 했지만요. 

겨울에 찾아오는 피부의 건조함은 사소할 수 있지만 절대 사소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동시에 겨울에만 찾아오는 유별난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편 바디로션과 립밤만 있어도 즉시 해결되는, 문제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현상에 속합니다. 삼 개월 동안 제 역할을 다한 녀석들은 이어지는 구 개월 동안 무관심 속에 잊히거나 버려집니다. 

입술이 갈라지기 시작한 날, 방 안 어디에서도 작년에 썼던 립밤이 보이지 않아 새로 하나를 산 날, 며칠 후 생일 선물로 또 하나의 립밤을 받은 날이 지나고 나니 책상 위에는 두 개의 립밤이 놓여 있습니다. 올겨울이 끝나고 다음 겨울이 왔을 때 어떤 녀석이 남아 있을까요. 혹은 둘 다 잃어버리고 또 새로 구매하게 될까요. 왜인지 모르게 립밤과 바디로션을 바라보며 지나간 인연의 얼굴을 떠올리는 제 자신이 유리창에 비치는 겨울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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