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아저씨의 패션 이야기 (7)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브런치에서 읽고 싶은 주제"라는 제목으로 설문을 올렸다. 다양한 답변이 달렸는데, 생각보다 클래식 의류를 다뤄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평소 내 스타일을 아는 사람이라면 “웬 클래식?”이라 반문할 테지만 질문을 던진 사람은 아마도 백화점 MD라는 직종에 기대한 바가 있으리라.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클래식에 꽝이 맞다. 우리 회사는 복식 문화에 있어서 (나름) 자유로운 분위기다. 비즈니스 캐주얼을 상시로 입을 수 있고, 명색이 패션 유통업이니 캐주얼하게 부리는 멋도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형국이다. 물론 여느 직장처럼 때론 정장에 타이까지 찰 일이 생기기도 한다. (높은 분들을 만나거나, 비즈니스 캐주얼이 익숙지 않은 상사분을 만나거나) 하지만 뭐 호박이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겠는가. 아쉽게도 나의 클래식에 대한 식견은 누군가에게 지식과 가치를 전파하기엔 너무나도 얕다.
정통 클래식 남성복에 쉬이 발을 들이지 못하는 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낮은 활동성이다. 슈트는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불편하다. 신축성이 좋은 원단이라도 결국엔 밑위가 짧아 불편하고, 가벼운 넥타이라 하더라도 탑버튼까지 묶어 올리면 목이 아프다.
전환비용은 두 번째 장애물이다. 가진 옷들을 모두 제쳐두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스타일을 옷장에 들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주제에 보는 눈은 있어서, 예뻐 보이는 슈트의 택을 들춰보면 매번 엄두조차 나지 않는 가격이다. 클래식에 눈을 뜨면 그랜져 몇 대는 쉽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업의 특성도 클래식에 발을 들이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백화점 엠디란 악으로 깡으로 뛰어다니는 직종이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결국 작업복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비싼 옷을 사봤자 어김없이 땀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마니, 좋은 옷을 쟁여도 일할 때 입기가 망설여진다.
다 떼놓고 보더라도, 여러 해에 걸쳐 만들어 놓은 취향이란 걸 변화시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격상 많이 보고 배우고 있지만, 입을 이유가 많지 않은 옷을 제값 주고 산다는 것은 언제나 망설여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다. 이미 내 옷장에 있으면서 출근 복장으로 적합한 옷들, 그리고 이들과 잘 어울려 선뜻 구매를 결정하게 되는 그런 브랜드의 옷을 요즘의 나는 즐겨 입는다.
그리고 오늘은 이런 정착지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클래식한 의류가 필요하지만, 스타일과의 괴리로 인해 변화가 망설여지는 사람들, 하이앤드급 앤트리를 구성하고 싶지만 비싼 가격대로 인해 구입이 망설여지는 사람들은 이번 포스팅을 주목할 것. 물론 필자의 취향이 그대로 들어간 글이니 경계하며 읽을 것을 추천드린다.
첫 번째 브랜드는 엔지니어드 가먼츠다. 네펜데스의 터줏대감인 엔지니어드가먼츠는 이제는 모르면 섭섭한 브랜드가 되었다. 많이들 알고 있듯 엔지니어드 가먼츠는 네펜데스의 PB상품이다.
유니온 스퀘어와 레드우드에서 연을 이어온 시미즈 케이조와 다이키 스즈키는 89년에 자신들의 편집샵인 네펜데스를 오픈했다. 당대 네펜데스는 미국발 브랜드를 바잉 하는 편집매장으로 알든, 레드윙, 트리커즈, 폴로 등의 브랜드를 소개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미제 상품들을 공식 수입했던 네펜데스는 온 열도의 주목을 받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급기야, 98년도에는 네펜데스 뉴욕 소호점을 오픈하기에 이른다. 결국 캐주얼의 본고장에 일본의 깃발을 꽂고 만 것이다.
다이키 스즈키는 당시 소호 지점 총괄이었다. 당시의 네펜데스는 바잉 능력만 놓고 보면 자타공인 최고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과제가 던져졌다. 그럴싸한 pb상품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우연한 기회로 파산 직전인 셔츠 공장에서 좋은 조건으로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다이키 스즈키는 곧바로 일본에 있는 시미즈 케이조와 협의를 거쳤다. 그렇게 현재의 엔지니어드 가먼츠가 된 “네펜데스”라는 PB가 세상에 등장했다.
엔지니어드가먼츠는 아메리칸 무드가 담뿍 묻어나는 70-90년대 의상들을 테마로 컬랙션을 전개한다. 워크웨어, 밀리터리, 프래피, 스포티 등 다양한 장르를 융합하여 친근하면서도 거칠고 딱딱하지만 실용적인 제품을 만든다. 대표 아이템인 베드포드 재킷과 베이커 재킷을 비롯한 다수의 스테디셀러는 매년 시즌 테마만 바꿔 같은 형태로 출시된다. 포플린, 리넨, 헤비 코튼 트윌, 나일론, 트로피칼 울까지 다양한 원단으로 제작이 되는데, 매 시즌 변주되는 무드가 멋스럽다.
엔지니어드가먼츠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나의 직종과 정확하게 어울린다. 동양인의 체형에 잘 맞춰져 편안하고, 슈트의 형태를 갖췄음에도 실용적이고 활동적이다. 사실 많이 어릴 때 좋아하던 브랜드였고 캐주얼에 더욱 심취하며 매물로 많이 떠나보내게 되었는데, 되려 직장에 다니면서 다시 손이 많이 가게 되었다. 점에 입점된 스컬프가 엔지니어드가먼츠 총판이다 보니 담당 찬스를 사용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피그벨은 히가시노 히데키가 2003년 런칭한 브랜드다.
(다이키 스즈키와 시미즈 케이조가 그랬듯) 헥틱이라는 편집매장에서 몇 년간 스탭으로 근무하던 히가시노 히데키는 2002년도에 피그벨을 설립했다. (보통 우리나라의 브랜드 문화와 유통 구조가 일본에 비해 20년 내지 30년 정도 뒤처져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우라하라 브랜드를 비롯해 당대를 평정한 브랜드들이 탄생한 시기나, 쟁쟁한 매장들이 만들어진 연대를 보면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인 것 같다.)
히가시노 히데키는 자신의 브랜드를 “뉴 클래식”이라고 정의한다. 직역하면 새로운 클래식이니 아리송하기도 하지만, 피그벨의 컬렉션을 보면 창작자의 정의가 완벽하게 이해가 된다.
피그벨은 30-50년대(최근엔 70년대까지도 다루는 것 같다.) 다양한 영역의 "클래식"을 복각한다. 남성복, 워크웨어, 밀리터리에 이르기까지 복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피그벨의 의류는 고집 있는 복각으로부터 탄생한다.
브랜드는 창조보다는 의복이 가진 기능미에 집중한다. 정확한 재현을 통해 의복의 형태 자체가 가진 매력을 부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속성이고, 브랜드를 지배하는 철학이다. 히가시노 히데키도 같은 이유로 스스로를 디자이너가 아닌 생산자로 지칭한다.
또, 이러한 이유로 피그벨이 만들어내는 컬렉션은 다소 딱딱하지만, 우아하며 직관적으로 아름답다. 피그벨이 동경하는 시대인 30-50년대엔 볼륨감 있고 볼드한 남성복이 유행했다. 당대엔 풍성한 라펠과 커다란 통에 일자로 떨어지는 트라우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발전해 온 군복에서 본따온 기능적인 장식들까지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겨 나는 옷들이 유행했다. 이러한 의류들을 본떠 옷을 만드는 피그벨의 의류는 당연하게도 드레시하다. 자칫 딱딱한 구닥다리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기능적인 면에도 집중을 게을리하지 않기에 현대적이면서 편안하다.
피그벨의 의류는 캐주얼과의 궁합도 괜찮다. 특히 위에 언급한 엔지니어드가먼츠와의 궁합이 좋다. 아메리칸 컬처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컬렉션을 전개하는 엔지니어드가먼츠와 철저하게 계산된 복각을 통해 컬렉션을 전개하는 피그벨은 성질이 완전 반대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반되는 특징은 상성의 힘을 가졌다. 엔지니어드가먼츠가 가진 자유로운 무드를 피그벨이 눌러주고, 피그벨이 가진 딱딱함을 엔지니어드가먼츠가 풀어준다. 적절한 발란스를 갖췄다고 할 수 있겠다.
피그벨의 경우, 국내에는 마니아층이 많지 않은 편이라서 다양한 헤리티지가 입고되지 않는 편이다. 그나마 바잉을 이어가는 곳이 lbb와 모드맨 정도인데, 그 마저도 풀컬렉션이 입고되는 것이 아니어 구입이 어렵다. 코로나 이후로 일본에 방문하지 못해 최근엔 일본 옥션을 통해 구입하고 있는데, 일본에 방문해 멋진 쇼룸에서 옷을 입어볼 수 있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여담으로 피그벨의 쇼룸의 사진을 보면 늘 감각적인 기명절지가 되어있는데, 인스타그램으로 이를 살피는 것도 소소한 행복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기명절지를 배우고 싶다.
“현대의 데스크 워커들을 위한 워크웨어”. 한 마디로 정의되는 테아토라는, 말 그대로 활동적이고 다이내믹한 클래식 캐주얼을 선보인다. 테아토라는 오피스 내에서의 포멀 한 무드를 유지하면서도 기능적인 면이 돋보이는 옷들을 만든다.
테아토라는 카미데 다이스케가 이끄는 브랜드이다. 디렉터의 인터뷰를 찾다 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현대인"이다. 그는 현대인의 일상에 녹아들 수 있는 옷을 만든다. 현대인의 작업복이라는 테마로 2013년에 테아토라를 런칭했고, 도심 속 현대인들의 트래킹을 주제로 15년에 alk phenix라는 브랜드도 병행하고 있다.
테아토라는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의복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묻어나는 브랜드다. 활동적인 정장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은데, 실제 사무 노동자가 되어 옷을 입어보면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포멀하지만 크기가 다른 주머니가 수십 개 숨어있다거나, 내부에 달린 주머니에 옷을 접어 휴대할 수 있게 되어있다거나, 구김이 지지 않는 소재를 사용해 툭툭 털어 착용할 수 있게 하는 등, 실용적이고 디자인적인 부분에서의 테아토라의 매력은 압도적이다.
휴대가 용이하고 구김이 적다는 테아토라의 강점은 매 주간마다 서울-울산을 왔다 갔다 하는 내게 아주 큰 메리트였다. 특히 심지나 안감이 없어 물세탁에도 용이해 관리가 편리하다는 것도 강점이다. 부득이하게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울산에 내려와야 하는 날에는 꼭 테아토라를 챙긴다.
한창 기능적인 옷에 빠져 있던 당시에 스쳐가듯 몇 번 착용해 봤는데 당시엔 비싼 가격에 비해 대안이 많아 손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격식이 필요한 직장인이 되고 나니 이것만 한 브랜드가 없더라. 뭐 단적인 예로, 테아토라의 바지는 허리에 밴딩이 되어있지만 모든 바지에 벨트루프가 있다. 편하게 착용하고 싶은 날에는 벨트 없이, 정장 대용으로 셔츠와 함께 입어야 할 때는 벨트를 착용할 수 있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옷을 입을 때 이렇게 느껴지는 디자이너의 배려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테아토라는 각각의 개체마다 이름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이 이름엔 개체의 특성을 살필 수 있는 힌트가 들어있다. 힌트는 세 부분 내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각각 "소재"와 "디자인" 그리고 "복종"과 "핏"을 뜻한다. 이를테면 닥터로이드 디바이스 재킷은 무더운 여름을 날 수 있을 정도로 얇은 닥터로이드 소재의, 아웃포켓과 체스트포켓, 파이브 버튼의 디테일을 갖춘 디바이스 재킷을 뜻한다. 패커블 왈렛 팬츠 오피스는 탄탄한 조직감의 나일론 원단으로 만들어진 깔끔한 치노 형태의 왈렛 팬츠, 그중에서도 오피스에서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단정한 테이퍼드 핏의 바지를 뜻한다. 개인적으로는 패커블 제품을 가장 좋아한다. 패커블 원단의 셋업을 다른 색상으로 두 구찌만 갖춰도 사실 다른 옷은 필요 없을 정도로 다용도로 활용이 가능하다.
브랜드는 동일한 디자인의 제품을 업그레이드해나가는 방식으로 시즌을 전개해 나간다. 테아토라는 디자인적인 면만큼 소재에 대한 관심이 많은 브랜드이다. 매 시즌마다 새로운 원단을 개발하고, 이를 스테디한 디자인에 입혀 해석해 낸다. 신제품은 매년 1-2개 정도 늘려 출시하니 디자인 보다도 옷의 속성에 집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니멀한 무드가 디자인과 잘 어울려 매력을 더한다.
한국에서는 아이엠샵을 통해서 구입할 수 있으나, 가격이 상당히 비싸 (한국에서 일본 브랜드가 비싸게 유통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다음에 다뤄봐야겠다.) 직구를 통해 구입하는 편이다.
베트라는 1920년대부터 프렌치 워크웨어를 보급해 온 전통 있는 브랜드이다. “VETements de TRAvail”, “노동의 의류”라는 말의 앞 단어를 따 VETRA라 명명하였으니, 브랜드의 이름부터가 아이덴티티를 물씬 풍기는 셈이다. 몽셸미셸과 당통, 르부아 등과 함께 프렌치 워크웨어의 정통으로 통한다. (몽셸 미셸이 1900년대 시작됐으니 연차로 따지면 선배이긴 하다.)
클래식에 있어, 프렌치 웨어는 형용할 수 없는 섹시한 맛이 있다. 영국의 슈트는 철저하게 계산된 군무와 같은 멋이 있고, 미국의 옷은 단단하게 쌓아 올려진 성과 같은 견고함이 있다. 프랜치 웨어(를 비롯한 유로피안 어패럴)는 이들과 정반대의 매력을 가졌다. 아무렇게나 접어 올린 셔츠 소매, 벤트가 없는 재킷, 제대로 잠겨 있지 않는 오픈버튼 단추, 풀어헤친 앞섶까지 자유분방하고 섹시한 매력이 있다.
베트라의 스테디셀러인 프렌치 워크재킷도 이러한 매력을 가졌다. 초어재킷(워크웨어를 총칭하는 말이므로 프랜치 워크웨어의 상위 개념에 속한다.)이라고도 불리는 이 재킷은 전면에 달린 세 개의 아웃포켓, 원 버튼(혹은 버튼이 없는)이 달린 소매, 벤트가 없이 이중박음질로 마무리된 것이 특징이다.
초어 재킷은 본디 노동자들의 옷이었다. 블루칼라라는 말도 이 프렌치 워크재킷의 파란 색상에서 파생됐다. 작업복의 용도로 사용되었기에 청바지와 마찬가지로 강한 마찰과 힘에도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내구성이 좋아야 했다. 그래서 몰스킨이나 메티스(면, 린넨 혼방), 트윌 등의 원단을 사용해 만들어졌는데, 이들의 탄탄한 조직감에서 오는 매력이 굉장히 섹슈얼하다.
현재 VETRA의 이미지는 브랜드가 일본의 파트너들과 함께하기 시작하며 만들어졌다. 1988년 경영학을 전공한 Patrick이 회사의 대표로 합류했다. 그는 boy's co를 비롯한 일본의 샵들과 파트너십을 맺으며 vetra의 이미지를 새롭게 정돈해 나갔다. 디자인에 현대성을 가미했고, 일본의 대중매체에 브랜드를 자주 노출시키며 작업복에서 캐주얼 재킷으로 이미지 피버팅을 시도했다.
90년대의 vetra는 현대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나가는 한편, 한편초대 창립자인 Beerens 가문이 보유했던 아카이브를 발굴하는 등 정통성을 더했다. 현재도 모든 원부자재는 프랑스산을 고집하며 전 제작 과정이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온고지신의 정신을 여실히 보여주는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VETRA재킷은, 멋 좀 부리고 싶은 날에 입으면 아주 그지없다. 개인적으로 크게 바이럴 된 드레익스의 초어의 경우 기장에 비해 품이 슬림해 영 어울리지 않는 느낌인데, VETRA의 재킷은 입으면 몸에 착 감기는 것이 딱 나의 스타일이다. 샴브레이 셔츠나 카라티의 단추를 열어 입고 그 위에 재킷 하나 걸치면 웬만큼 힘준 연출보다 자연스럽고 멋지다. 내가 가진 수십 가지 빈티지 티셔츠와도 궁합이 좋으니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실용적인 면도 돋보인다. 직장의 특성상, 여름에도 경우에 따라 재킷을 착용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땀이 많은 나는 곤욕이다. 이러한 상황에 VETRA의 HYDRONE COTTON은 꽤 적합한 원단이다. 얇으면서도 신축성이 좋고, 린넨처럼 구김 걱정 없는 이 소재의 재킷은 여름철 나의 라이프 스타일에 제격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꿈꾼 적 없었던 직장인이 되었다. 정시 출퇴근을 하는 삶이 아직도 영 어색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의복생활에 대한 고민은 계속해서 든다. 지난 30년간 나에게 있어 옷이란 나를 표현해 내는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였다. 앞으로 계속해서 회사생활을 이어나간다면, 나의 일상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회사가 될 것이고, 회사에서 입는 옷이 곧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물론 조직의 문화에 순응하는 태도도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직에서 설정해 놓은 문화적 프레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입었을 때 즐거운 옷을 입고 싶다. 위에서 구구절절 이야기한 대로 여전히 나는 캐주얼이 좋다. 직장인이 되면서 자주 들락날락하는 샵의 간판이 모조리 바뀌었음에도 선뜻 클래식을 구입하는 것은 어렵고, 100만 원짜리 슈트를 한 벌 사는 것이 5만 원짜리 모자를 살 때보다 스무 배나 행복하진 않다. (뭐 다섯 배 정도는 행복하다 ㅋ) 지금까지 내가 가꿔왔던 취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나의 회사 내에서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가고 싶다.
한참 전에 샌프란시스코 마켓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야말로 정통 남성 클래식을 소개하는 굴지의 샵에서 엔지니어드가먼츠(와 바튼웨어 같은 리조트웨어)를 바잉 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는 브랜드 초창기만 해도 도전적으로 여겨졌던 디자인이 하나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아가는 것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만큼 완벽한 변주를 해내는 브랜드가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동감하는 바이다. 클래식이란 것은 결국 오랜 기간 동안 사랑받는 장르를 뜻한다. 비록 누군가의 눈에는 캐주얼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계속해서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들을 착용하고, 좋아할 것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 멋지게 의복생활을 즐기다 보면, 언젠간 딱딱한 회사생활에서도 이 브랜드들이 하나의 클래식으로 인정받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