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 오펜하이머를 관람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한동안 화제였던 CG 없이 연출한 핵폭발 장면도 멋있었지만, 그보다 나의 눈을 끈 것은 오펜하이머(극중 킬리안머피 扮)의 코스튬이었다.
극중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을 모아 로스앨러모스에서 맨하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로스앨러모스는 프로젝트 이후 국립 연구소가 들어서며 현대 미국 핵개발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로스앨러모스가 행정적으로 포함된) 뉴멕시코주는 나바호 문화의 발상지였던 인디언 주거지역이었다.
영화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완벽히 고증했다. 뜨거운 태양을 가리기 위해 착용한 페도라와 터콰이즈와 나바호 전통 문양으로 장식한 벨트, 벨트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짧은 넥타이와 늘 지니던 파이프까지. 오펜하이머가 착용한 거친 매력의 서부 악세서리는 드레시한 50년대 수트와 만나 생경하면서도 조화로운 인상을 남겼다. 또, 이러한 의상은 주인공의 캐릭터를 대변하는 장치로서 작용했다. 언발란스하면서도 멋스러운 오펜하이머의 코스튬은 물리학자로서 자국의 안보를 위해 노력했지만 역사에는 살인자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양가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 24FW 파리 패션위크에서도 오펜하이머가 곧바로 연상되는 컬렉션을 마주했다. 바로 퍼렐 윌리엄스의 두번째 LV 콜렉션 쇼 "파리 버지니아(Paris Virginia)"였다.
쇼는 진한 서부극을 런웨이로 옮겨놓은듯 했다. 영롱한 터콰이즈의 청록은 컬렉션의 메인 칼라로 사용되었고, 페도라, 웨스턴벨트, 데님, 부츠, 프린지 등의 요소는 런웨이의 포인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모델 역시 정통 백인을 지양하고 흑인과 히스패닉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듯 했는데, 로데오맨이나 카우보이, 인디언과 같은 캐릭터를 직관적으로 연상케 했다.
루이비통의 이번 쇼는 장안의 화제였다. 각종 매스컴과 평론가들은 앞다투어 퍼렐의 모험을 칭찬했다. 심지어 컬렉션에 심취한 나머지, 버지니아를 카우보이와 연관지으려는 무리한 시도도 나타났다. (버지니아와 서부극간의 상관관계라니. 함흥에서 먹는 평양냉면같은 느낌인가.)
하지만 나는 컬렉션을 보는 내내 쇼의 원초적인 아름다움보다는 기시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물론, 퍼렐 윌리엄스의 디렉팅이 그 자체로 뛰어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패션 산업이란 대중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소스를 잘 다뤄낼 때에 트렌드가 되는 세계다.
오펜하이머는 23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우주/조연상, 음악상을 휩쓸었다. 24년 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이르러서는 최다 노미네이트 작품으로 선정되는 등 그야말로 한 해를 지배하는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퍼렐은 메가 컨텐츠의 테마를 쇼의 꼭지로 다뤘다. 사회의 조류를 잘 읽어낸 디렉션은 좋은 평가를 받기 쉽다. 문화라는 장르란 필시 사회 상황과 상호작용하며 발전해 나가기 때문이다. "파리 버지니아"가 대중들로부터 좋은 디렉션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어디선가 본듯한 "서부극"의 테마와 거칠면서도 드레시한 "양가적인 아름다움"이 런웨이에 녹아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영화와 컬렉션을 감상한 뒤, 관심을 끊었던 나바호 쥬얼리와 터콰이즈에 한동안 관심을 두고 지냈다. 액운을 물리쳐준다는 나바호 쥬얼리에 대한 인디언들의 믿음을 떠올리며 올해는 꼭 화려한 악세서리를 하고서 바닷가에서 여름을 보내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