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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ngdaeone Apr 20. 2023

어디까지가 카피일까?

(풋)아저씨의 패션 이야기 (4) - 버버리와 교복, 오마주와 카피

 며칠 전 팀장님께서 "버버리랑 교복이랑 어떻게 됐냐?"라고 물으셨다. 소송 이야기였다. 버버리는 2019년 한국 전역의 200여 개 중ㆍ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어왔다. 교복에 사용된 체크무늬가 자신의 노바체크 디자인과 유사하다는 이유였다. 법원은 버버리의 손을 들어줬다는 소식을 팀장님께 전했다.

 헌데, 기사를 검색해 보니 판결이 조금 이상하다. 재판부는 교복에 사용된 체크무늬 디자인이 버버리의 "상표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디자인 무단사용이 "디자인 도용"이 아니라 "상표권 침해"라니. 어쩌다 이런 결과기 나오게 된 것일까. 법원이 개념을 혼동하기라도 한 것일까?

버버리의 노바체크 디자인과 한국의 교복. 이미 누구나 알고  있었듯이 상당히 비슷하긴 하다.

 “체크무늬를 무단으로 사용하여 버버리의 상표권을 침해했다.“라는 판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디자인"과 "상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디자인과 상표는 산업재산의 하위 개념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핀터레스트에 디자인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이미지들. 여러 산업의 디자인을 포괄하는 큰 개념이긴 하지만, 대충 봐도 디자인된 이미지 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자인’은 현행 디자인보호법에 "시각을 통해 파악되어 미감을 일으키는 물품에 구현된 미적 외관”으로 정의되어 있다. 말이 좀 어려운데, 풀어서 이해하면 나름 직관적이다. 위 정의에 따르면 디자인은 "시각성", "심미성", "물품성", "형태성" 이상의 네 가지 성질을 가진 개념이다.

 첫 번째 구성요소인 "시각성"은 보이는 속성을 뜻한다. 두 번째 "심미성"은 미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성질을 뜻한다. 세 번째로 "물품성"이란 독립거래가 가능한 물품(유체동산) 일 것을, 마지막 "형태성"이란 물품의 외관에 드러나야 할 것을 규정하는 성질이다.

 즉, 어떠한 대상이 "디자인"인지 판별하기 위해서는 "⑴눈으로 보이는 ⑵물건에 적용된, ⑶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⑷특정한 형태"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이렇게 확인된 "디자인"을 보호하는 법이 "디자인 보호법"이고, 디자인 보호법을 통해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디자인권"이다.

핀터레스트에 상표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이미지들. 디자인 검색값에 비해서 단체나 브랜드를 대표하는 일종의 징표들이  등장한다.

 이에 반해, '상표'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타인의 것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장이다. 상표에 대한 정의는 현행 상표법에 명시되어 있다. 법률은 상표를 "상품을 생산, 제조, 가공 또는 판매하는 자가 자신의 상품을 다른 업자의 상품과 식별하고자 그 상품에 대해 사용하는 기호나 문자, 도형"으로 정의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브랜드 마크, 로고, 라벨, 택 등이 상표에 포함된다. 이러한 상표를 보호하는 법이 "상표법"이고, 상표법을 통해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상표권"이다.

인라인 스케이트의 형태는 디자인이고, 인라인 스케이트 브랜드 중 하나인 롤러 브레이드 마크는 상표다.

 디자인이란 물품의 장식적인 외관이고, 상표란 브랜드를 식별할 수 있는 기호이니 확실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또, 두 개념의 차이로 미루어 버버리의 체크무늬는 분명 "상표"보다는 "디자인"의 속성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버버리 체크를 "디자인"이 아닌 "상표"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란 무엇일까?


하나의 디자인으로 사용되는 슈프림과 우영미의 로고. 이제는  저 빨간색 박스로고는 젊고 트랜디한 스트릿 패션신을 대표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디자인으로 사용되는 ksubi의 라벨. 이 역시 라벨이 하나의 디자인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브랜드의 상표를 디자인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슈프림이나 우영미처럼 로고를 이용한 로고플레이를 하는 경우나, ksubi의 팬츠처럼 택을 디자인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그렇다. 단순한 로고지만, 이들의 형태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디자인의 일환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르지엘라의 스티치 디자인과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디자인. 디자인만 봐도 어떤 브랜드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반대로 디자인을 하나의 상표처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스티치나, 루이비통의 모노그램이 이러한 경우에 포함된다. 이들은 하나의 디자인으로서 작용하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트레이드 마크처럼 사용되었기에 브랜드를 인식하는 표상으로써 기능하기도 한다.

 이렇게, 상표와 디자인의 구별이 모호한 경우에 상표법과 디자인보호법 중 어느 법률을 적용해야 하는지 판단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디자인과 상표는 배타적, 선택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디자인이 될 수 있는 형상이나 모양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표의 본질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상표로서의 사용이라고 보아야 한다.(2009후665)“ 디자인이 상표로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버버리의 소송에서도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체크무늬를 하나의 상표로 인식했다.

국내에 "상표 등록"이 되어 있는 버버리 체크(좌)와 "디자인 등록"이 되어있는 버버리 체크
kipris는 국내 출원이 되어있는 모든 디자인/상표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다.  해당 사이트에 "버버리"를 검색해 보면, 버버리 체크가 상표 등록과 디자인 등록 모두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버버리 이외에도 루이비통과 구찌의 모노그램처럼, 디자인이 브랜드를 인식하는데 주요한 기능을 하는 경우, 상표권으로도 등록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 디자인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 상표권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궁금증은 해결이 되었다. 그렇다면 버버리는 체크무늬를 왜 "상표"라고 주장했을까? "디자인 침해"라는 주장하는 것이 더 간단하지 않았을까?

 여기엔 법률에서 정해놓은 권리의 유효기간이 큰 이유로 작용했다. 상표권의 소멸시효는 디자인권의 소멸시효보다 길다. 디자인권의 소멸시효는 디자인 출원일로부터 20년이다. 이에 반해, 상표권의 소멸시효는 10년마다 갱신이 가능하여 영구적으로 존속시킬 수 있다.

 버버리가 19C 중반부터 시작된 브랜드임을 감안했을 때, 체크무늬 디자인에 대한 권리는 오랜 기간이 지나 소멸됐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상표권은 갱신을 통해 영속되어 왔다. 이러한 이유로 버버리는 "디자인권 침해"가 아닌 "상표권 침해"를 쟁점으로 내세우며 소송을 진행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소송은 버버리의 승리로 끝났고 소송 결과에 따라 올해부터 체크패턴을 사용하던 모든 학교의 교복 디자인이 바뀌게 되었다.

2014년에 있었던 소송의 주인공 살로몬의 "센스 프로"와 라푸마의 "프렌치 익스프레스 1.0." 철수한 사업인 라푸마이긴 하지만.. 판단은 독자 여러분께 맡기겠다.

 산업재산권에 대한 다툼은 한국 패션의 역사에서 종종 등장해 왔다. 굳이 법적 다툼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국의 패션신은 카피를 떼어놓고 말하긴 어렵다. (또,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디자인 카피는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정가를 지불하고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을 무시하는 행동이며, 디자인과 캠페인을 위해 투입된 막대한 양의 인적ㆍ물적 비용을 우습게 여기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카피와 복제는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대놓고 짝퉁을 제조 및 판매하는 업자들도 있고, 모르는 척 카피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경우는 그나마 낫다. 적어도 법망을 피해 다니는 동안 자신의 행동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하게 될 테니까. 사실 정말 큰 문제는 그럴싸한 카피캣들의 승승장구다.

22'와 23', 수많은 네셔널 브랜드의 컬렉션 테마가 되었던 미우미우와 디젤.

 조금만 살펴보면 유명 브랜드의 테마들을 짜깁기한 컬렉션을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무임승차가 위대한 창조인 것처럼 떠벌리고 다니기도 한다. 또, 심지어는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스스로 믿기도 한다. 이러한 기만은 브랜드의 규모를 가리지 않는다. 대기업 소속의 브랜드라고 다른 것은 없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형 브랜드 역시 하이앤드 패션을 베껴 상품을 출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한국의 카피는 급격한 경제성장과 맞물려 시작됐다. 패션과 관련된 자원이 빽빽이 밀집되어 있는 동대문 상가에서는 잘 팔리는 상품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간단했다. 카피는 하나의 생존 전략이었다. 잘 나가는 상품이라면 너도 나도 뛰어들어 똑같이 따라서 만들었고 양질의 제품을 완벽하게 따라 해내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었다.

 최근엔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카피가 이뤄지고 있다. 카피는 사회관계망을 통해 더욱 빠르고 대단하게 이뤄진다.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의 디자인을 카피하거나, 하이앤드 브랜드의 아카이브를 그대로 따라 해 자신의 디자인인척 판매하는 브랜드도 있다.

수많은 브랜드에서 복각해내는 og107. 이것을 카피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옷도 입을 수 없을 것이다.

 애당초, 무 자르듯이 카피와 창조의 경계를 나누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의복이 가진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의복은 그 형태가 정해져 있다. 티셔츠와 셔츠, 바지와 치마, 가방과 신발은 각각의 기능과 용도에 따라 형태가 정립되어 있다. 또, 패션은 (순수예술에 비해) 더 이상 발전해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마스터피스들이 존재한다.


23S/S에 출시된 re/done, mother, ralph laruen의 퍼티그 팬츠. 명작에 대한 복각과 재해석은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트렌드는 이렇게 정해진 형태에 해석이 더해지며 발전한다. 새로운 조합을 통해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디테일한 부분에 변주를 주어 위트를 더하는 등 베이식한 형태 위에 디자이너의 정체성이 가미되며 발전한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창조에 형태를 끌어오는 것은 재료를 구비하는 과정이지만, 표현을 가져오는 것은 거푸집을 훔치는 것이다. 이를 인지하지 못하면 아무리 창조적인 행동을 했다고 한들, 누군가의 생각을 따라 했을 뿐이다.

역사에 대한 이해와 가치를 배제한 완벽한 모사는 절대로 창조가 될 수 없다.

 모름지기 창작자는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 깊고 잦은 사유를 해야만 한다. 이를 통해 창조의 철학을 만들고, 엄격한 잣대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야 한다.

 성숙한 소비의식 역시 필요하다.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취향의 근본에는 무엇이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왔는지, 또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파생의 역사를 들여다보다 보면 자연스레 문화적 안목을 높일 수 있다.

 나 역시 세상에 없던 완벽한 창조는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긴 하다. 위대한 창작자들도 필시 누군가의 창조를 동경하며 꿈을 키웠을 것이다. 하지만 동경과 오마주는 카피와 다르다. 치열하게 연마하여 학습해낸 기본기를 바탕으로 창조와 해석을 올바로 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숙한 창작문화는 정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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