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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아나의 행복일기 Apr 11. 2024

모든 걸 시도해 보세요

화선지 소동

  '화전지!’ 아침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호야가 말했다. ‘화전지’가 아니고 ‘화선지’, 선물할 때 ‘선’이야, 라고 아이에게 알려주었다. 요즘 학교에서는 수묵화 그리기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지난주 알림장을 보니 다음날 준비물로 화선지를 가져오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 집은 호야가 다니는 초등학교와 거리가 멀어 준비물은 대부분 내가 인터넷쇼핑으로 미리 산다. 그런데 쇼핑 앱에 들어가 보니 화선지를 100장 단위로 판다. 양이 너무 많다. 이 정도는 필요 없으니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녁에 퇴근하고 나니 민이 데리고 밖에 나가기가 귀찮았다. 민이는 한창 유튜브에 몰두하고 있어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문방구에 전화해서 화선지가 있는지, 가게를 몇 시까지 하는지 물었더니 8시까지 한다고 했다. 퇴근하는 남편에게 전화해서 오는 길에 화선지 좀 사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주가 되었다. 근무하다가 문득 핸드폰 알림장 앱을 보니 이틀 후 수묵화 수업이 있으니 준비물 가져오라고 쓰여있다. 퇴근길에 학교 앞 문구점에 들러 화선지를 사갈까 하다가 아이에게 준비시키자는 생각이 들었다. 호야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데 알림장을 자기가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예 없다. 내 핸드폰에 있는 알림장 앱을 열어두고 같이 읽자고 해도 ‘잠깐만’을 연발하며 늦장 부리기 일쑤이다. 보통 아이 같으면 ‘네 준비물은 네가 챙겨야 하는 거야’ 하며 결과를 직접 경험해 보라고 그냥 두겠다. 하지만 불안이 높고 어른이 약간만 뭐라고 해도 크게 혼났다고 생각하는 호야의 특성을 고려해야 했다. 혹시라도 담임 선생님이 한마디라도 하시면 아이는 다음날 선생님께 혼났다면서 등교 거부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1학기 때에는 반성문을 써서 학교에 가기 싫다며 아침마다 생떼를 쓰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 친구 엄마에게도 물어보고 담임 선생님께 전화해 보니 호야 반 학생 절반 이상이 급식 후 자리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반성문을 썼다고 했다. 내가 담임 선생님께 호야가 학교 가기 싫다고 해서 걱정된다고 하자, 선생님이 호야는 사정을 참작하겠다고 하셨다. 담임 선생님께서 봐주셔서 그런지 그 이후부터는 아이는 별다른 말 없이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 

  이러니 내가 준비물에 신경을 써야 했다. 호야가 ‘아저씨 문구점’이라고 명명한 학교 앞 문구점은 아이가 용돈으로 간식 사 먹는다고 자주 들리니 거기서 화선지를 사 오라고 해야겠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호야가 아침을 맛있게 먹는다. 평소 같이 김에 밥을 싸서 훈제 닭가슴살을 곁들여 아침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다. 먼저 바삭한 김 위에 따끈따끈한 밥을 한 숟가락 올린다. 그 위에 매콤한 닭가슴살을 한 조각 놓은 후 김 양 끝을 신중하게 오므려 즉석 꼬마 김밥을 만들어 입을 크게 벌리고 쏙 넣는다. 진지한 표정으로 밥을 씹는 아이 볼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귀엽다. 호야는 어릴 때부터 음식을 맛있게 먹어 어른들이 복스럽게 먹는다고 좋아하셨다. 본인이 정한 절차대로 신중하게 밥을 먹는 아이 모습을 지켜보자니 음식을 대하는 신성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내가 보기에 호야의 오감 중에 가장 발달한 부분은 미각이다. 귀하고 맛있는 음식은 아이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열성적으로 먹는다. 호야가 미각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말을 걸어도 별 소용이 없는데, 조급한 마음에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잠시 뒤에 민이도 깨우고 등원 준비도 해야 했다. 호야에게 학교 끝나고 뉴스포츠 수업하러 갔다가 ‘아저씨 문구점’에 가서 내일 준비물인 화선지를 사 오라고 했다. 요즘 학교에서는 학습장애 학생들을 위해 ‘뉴스포츠 교실’을 운영 중이다. 체육 선생님이 신체활동과 게임을 진행하신다. 아이는 내 말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호야는 종종 내가 말하면 마치 말소리가 안 들리는 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아이의 특성을 알면서도 답답했다. 내가 한 번 더 물어도, 아이는 “잠깐만 나 밥 먹고”라고 무심하게 답할 뿐이었다.      

호야, 날아볼까? 2024년 호주 가족여행에서.

채색 붓

  호야와 민이를 보내고 출근했다. 바쁘게 일하다가 문득 핸드폰의 알림장을 보았다. 작은 글씨로 지난번에 사용한 ‘서예 붓’은 안 되고 꼭 채색 붓을 준비하라고 담임 선생님께서 당부하셨다. ‘아뿔싸!, 어제 놓쳤네.’ 학교 앞 문방구에 전화했다. 문방구 주인에게 아이 이름을 알려주고 아이가 곧 화선지 사러 갈 건데, 채색 붓도 같이 달라고 부탁드렸다. 문구점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주면 비용을 이체하겠다고 했다. 이날따라 병원 무전기에서 나를 계속 부른다. 틈나는 대로 겨우 이체를 마쳤다. 때마침 아이 전화가 왔다. “호야, 내일 채색 붓도 필요하대. 엄마가 아저씨 문구점에 전화하고 돈도 냈어. 가서 네 이름 말하고 엄마가 전화했다고 하면 돼.”라고 말했다. 이 정도면 호야가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환자 처치 후 방에 왔더니 또 전화가 와 있다. 아이에게 다시 전화했더니 “엄마, 돈이 없어서 채색 붓 못 샀어. 아저씨한테 화선지만 샀어.”라고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의아했다. 아이에게 어디냐고 물으니 버스 타고 집에 가고 있다고 했다. 

  “엄마가 돈 다 냈는데? 호야가 그럼 천 원 더 낸 거야. 다시 문구점에 가서 천 원 돌려받고 채색 붓도 가져와야겠네.” 나와 통화한 아주머니는 문구점 안에 있었고, 호야는 밖에 서 있던 아저씨에게 화선지를 산 모양이었다. 문구점에 다시 돌아가라고 했더니 호야가 말했다. “그럼 쉴 시간이 없잖아!” 쉴 시간 없다니. 수요일은 방과 후 뉴스포츠 수업이 1시 30분에 끝나는데 이후는 일정이 없다. 호야 입장에서는 오늘은 휴식의 날인데 조금이라도 자유시간 침범받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럼 어떡해, 내일 준비물인데, 이건 네 준비물이니까 네가 챙겨야 하는 거야”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문구점에 다시 전화했다. “아주머니, 좀 전에 아이가 갔는데 아저씨에게 화선지만 샀대요, 채색 붓 주시고 천 원 내주시면 돼요”라고 말했다. 

  일하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났다. 핸드폰의 구글 패밀리 링크를 열어 호야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아직 학교 근처 아파트 단지에 있다. ‘평소에 지나는 길이 아닌데 왜 여기에 있지?’ 호야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말했다. “나 채색 붓 샀어.” 잘했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시어머님의 전화가 울렸다. “야야, 애가 안 와서 전화했더니, 뭔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채색 붓을 사러 문방구로 걸어가는 중이란다. 그거 사고 집에 오랬더니 힘들어서 못 걸어온단다. 할머니가 데리러 오라고 해서 내가 지금 나가려 한다.” 내 말을 듣고 호야가 버스에서 내렸는데 문방구까지 걸어간 모양이다. 평소에는 그렇게 걸어가자고 해도 굳이 버스를 타고 가더니 오늘은 왜 걸어갔을까. 더군다나 지금은 오른쪽 발가락뼈 골절로 발에 깁스도 하고 있는데 말이다. 평소와 다른 일이 생겼으니, 호야 입장에서는 피곤했던 모양이다. 

 호야는 늘 하는 일은 큰 무리 없이 해내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처리하는 걸 힘들어한다. 이 아이는 다른 사람은 순하다고 하는데 왜 나는 아이가 융통성 없고 고집이 세다고 느낄까, 고민하기도 했는데 지난번에 발달센터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느린학습자들의 특징인 ‘사고의 유연성’ 부족 때문이라고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평소에 횡단 보도를 두 개 건너 ‘ㄱ’ 모양으로 길을 건넜으면 한 번에 갈 수 있는 사선 횡단보도가 생겨도 예전에 하던 방식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러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어찌할지 모르고 당황하여 엉뚱한 행동을 하곤 한다. 평소 하던 일은 괜찮은데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처리할 때 어김 없이 실수했다. 이해가 안 되었으면 다시 물어보면 좋을 텐데 보통은 ‘네’하고 얼렁뚱땅 넘어간다. 살다 보면 늘 새로운 상황이 툭툭 튀어나오기 마련인데 이런 부분 때문에 아이도 나도 피곤하다. 전화 통화를 확인해 보니 이 문제로 아홉 건의 통화를 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호야는 어떤 점이 이해가 안 된 거지? 


  첫째, 내일 준비물 화선지와 채색 붓을 아저씨 문구점에서 사야 한다.

  둘째, 지난번 사용한 서예 붓 말고 채색 붓이 꼭 필요하다.

  셋째, 엄마가 문구점에 전화해서 주문했고, 돈도 이미 냈다.

  넷째, 나는 문구점에 가서 ‘호야에요, 엄마가 전화했어요’라고 말하면 된다.

  다섯째, 문구점에서 준비물 받아 집으로 간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아이로서는 엄마가 여기에 없는데 어떻게 돈을 냈다는 거지, 라고 생각할 만하다. 아이에게 이체의 개념을 알려줘야겠다. 그런데 호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어떻게 알려줄지 고민해 봐야겠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진다. 메모장 앱에 있었던 일을 빠르게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나중에 글감으로 써야지. 그래도 호야가 기특하다.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문방구로 갔다는 점이 놀랍다. 저녁에 가서 칭찬해 주고 꼭 안아줘야겠다. 느린학습자 아이를 키울 때 부모가 할 역할은 어떤 과제가 있을 때 다 해주면 안 되고 본인 수준에 맞추어 과제를 제시하여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매번 이렇게 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냥 내가 해버리면 빠르고 속 시원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과제를 아이에게 통째로 던져서도 안 된다. ‘그것도 못 하니!, 네가 알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해봐’ 하고 과제를 툭 던지기보다는 아이가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잘게 잘라 주는 기술이 중요하다. 어느 정도 잘게 자를 것인가는 아이의 상황과 성장을 보고 조절해야 한다. 수박 먹으라고 통째로 주면 아이는 지레 겁을 먹고 수박 안 먹는다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마치 옛날 할머니들이 아기들 밥 먹일 때 본인 입에 넣어 조금 씹고 침으로 말랑해진 밥을 아기에게 먹이던 방식이랄까. 여하튼 이번 사건으로 호야는 ‘화선지, 채색 붓’이라는 이름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샤키라의 ‘모든 걸 시도해 보세요 (Try everything)’ 노래를 들었다.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가수의 시원한 목소리와 노래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와 꽂혔다. ‘새는 처음부터 하늘을 날지 못한다. 떨어진 후 다시 일어나 날아다니는 법을 배운다.’ 

https://youtu.be/c6rP-YP4c5I?si=41__GVZ9cs3hlu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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